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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태준 시인 / 가죽나무를 사랑하였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9.

문태준 시인 / 가죽나무를 사랑하였다

 

 

지난 여름 나는 가죽나무를 사랑하였다

늘 어둡고 눈이 침침하던 나무를 사랑하였다

 

지난 여름 나는 가죽나무를 사랑하였다

나무에서 둥지를 틀던 검은 소리들을 사랑하였다

말라붙은 우물처럼 알몸으로 그녀가 우는 것을 사랑하였다

매미의 뱃가죽보다 많이 주름진 그 소리들을 사랑하였다

사람을 온전히 사랑해본 바 없이 나는 가죽나무를 사랑하였다

 

 


 

 

문태준 시인 / 뻘 같은 그리움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조개처럼 아주 천천히 뻘흙을 토해내고 있다는 말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언젠가 돌로 풀을 눌러놓았었다는 얘기

 

그 풀들이 돌을 슬쩍슬쩍 밀어올리고 있다는 얘기

 

풀들이 물컹물컹하게 자라나고 있다는 얘기

 

- 문태준 시인의 시집 <맨 발> 중에서

 

 


 

 

문태준 시인 / 백로白露

 

 

뒤늦게 애가 들어선 사십대 여자처럼

늙은네 발톱같은 껍질을 가르고 붉은 석류가 터져나오고 있었는데,

바람도 으스름달도 모르게,

먼데서 온 마수걸이 손님처럼

이슬 하나까지 얹혀,

그래도 살아남은 꽃시절이 있었다

 

 


 

 

문태준 시인 / 내 마음이 흉가에

 

 

돌무지 길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내 마음이 흉가에,

 

바퀴소리를 다시 듣는다는 것 얼마나 어려운가

한때 굴러다니던 저 자전거, 흙 덮어쓴 농구 곁에 멈춰 있다

 

옛 애인은 가고 없어 능구렁이처럼 나 홀로 흉가에 들어앉는 것,

바람이 안장에 앉아 무료하게 바퀴를 돌리고 있다

 

녹슨 살대에 기름칠을 하는 것 얼마나 어리석은가

탱탱하게 공기를 채워넣어 기다린다는 것 얼마나 버려진 일인가

 

 


 

 

문태준 시인 / 돌들이 팔을 괴고 앉아

 

 

주둥이 긴 한무리의 멧돼지떼가 콧김을 뿜으며 물위를 이동하고 있네

먼지기둥처럼 안개를 털어 내놓는 새벽 물길

 

물길 아래

돌들은 팔을 괴고 앉아 복화술로 말을 걸고 있네, 물길에 대하여

 

“노적가리만큼금고만큼우리가우리를잠근다는것은버팅긴다는것은무엇인가물소리를귀따갑게들려오는물소리를엿보지않는다는것은무엇인가어정쩡한관음증은무엇인가곡괭이처럼나를캐내무리가운데로밀어넣는물길은얼마나불온한가”

 

 


 

 

문태준 시인 / 비 지나가는 저수지

 

 

구름이 사람과 엉킴은 오래된 재실 마당에서나 있을 일이다

비 지나가는 저수지 다들 돌아간 녘에

어둠이 오리떼를 종용하며 모가지에 절구 같은 울음으로 고인다

나는 지렁이의 몸통 반을 잘라 저수지에 담가두고

이 넓은 토란잎에 빗발이 듣는 걸 본다

붕어쯤 갈쿠리를 입에 넣고 당기는가본데

나는 바둑돌을 올려놓듯 무심하다

마을에서 누군가 올라와 거머리밥이 되기까지의 자살행위가

빗발을 받는 이 토란잎의 이력이다

한배의 새끼를 낳은 토끼장에 누런 족제비 한 마리를 들여 놓고 그놈들끼리 물고 뜯는것을 멀찌감치서 지켜보듯

유쾌하게 나는 내 낚싯대를 당기는 물밑 유속과

더 밑에 가라앉은 돌들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씨알 굵은 고기들의 저 근육이 어디서 연유할까

오리떼가 더 깊게 절구통을 찧어댈수록 혼자 남아 있자니

이 토란잎이 서낭당 같아 더럭 무서워져 낮게 중얼거린다

구름이 사람과 엉킴은 오래된 재실 마당에서나 있을 일이다

구름이 사람과 엉킴은 오래된 재실 마당에서나 있을 일이다

 

 


 

 

문태준 시인 / 사라진 뱀 이야기

 

 

외할아버지의 낡은 옷을 보며 나는 뱀의 껍질 같은 비릿한 내를 맡았다

지게의 등이나 받쳐주던 지겟작대기 끝에 뱀 한 마리가 대롱대롱 걸려 들어왔다

숫돌에 얹혀져 푸른 등을 내보이던 낫보다 그 능구렁이가 더 무서워 보였다

(저녁연기가피는집을방문한者/그놈을/낯선꽃이라/부르겠네)

 

뱀을 본 누이들이 서둘러 굴뚝을 돌아 도망쳤다

목구멍이 조인 그놈을 보니 내 목이 갈근거렸다

작고 빈 독을 가져다 놈을 집어놓고

외할아버지는 독 안에 뭐가 무서운 것이 들어찼을 것이라며 혀를 찼다

독에 뚜껑을 얹고 그 위에 큰 돌을 하나 더 얹었다

놈의 목이 딸각딸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꽃도갇히면숨을멎을까?/낯선꽃꺾어질까?)

 

늙은 능구렁이는 쉬이쉬이 휘파람을 분다고 외할머니는 생전에 얘기했다

쉬이쉬이 휘파람이 끝나는 자리에서

그놈을 데려갈 놈들이 밤새 끝나는 자리에서

그놈을 데려갈 놈들이 밤새 기어온다는 것이었다

외할머니는 쉬이쉬이 숨이 가빠지더니 저승으로 가버렸다

(외할머니도生이라는것을살았다면/하나의꽃?)

 

일전에 동네에 여자가 길 위에서 죽었다

여자는 연신 애를 배어, 애를 배게 만든 남정네들이 그 여자를 매번

둔덕에서 밀어버린다고 소문이 돌았다

둔덕에 매어져 있던 소가 비탈로 굴러

솔방울 같은 눈망울을 하얗게 만들며 죽는 것을

나는 아주 가까이서 본 적이 있었다, 그 여자도 소처럼

눈자위가 하얗게 쇠어버렸을 게다

여자가 미치면 소를 닮는다,고 누군가 말했다

미친 여자는 늙은 구렁이가 거두어 간다,고 누군가 말했다

(미친여자도꽃이었을까?/그꽃씨들은?)

 

토끼 귀보다 높게 귀를 허공에다 내다걸어

그 작고 까만 독을 나는 꼬박 지켜보았지만

아카시아가 많은 공동묘지 산에서부터 길 위에까지

해가 천천히 걸어내려오는,그런,오래된 아침만 반복되었다

(들깨하얀꽃망울에피어나던세월이이따금/자줏빛가지꽃에가서

피고지고하였다/능구렁이가사라졌다!/아무도

독을열지못했다/손끝멀리피어있는꽃!)

 

 


 

문태준(文泰俊) 시인

1970년 경상북도 김천 출생. 1955년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석사학위.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 취득.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處暑〉외 아홉 편이 당선되어 등단.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2004년 〈동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2005년 〈미당문학상〉, 2006년 〈소월시문학상〉, 2014년 〈서정시학작품상〉, 2018년 〈목월문학상〉을 수상.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