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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노향림 시인 / 스킨답서스는 날개를 단 흔적이 있다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9.

노향림 시인 / 스킨답서스는 날개를 단 흔적이 있다

 

 

베란다 창틀에 쿵! 무언가 부딪치고

빨래 건조대에서 표백되어 가던 햇빛 몇 벌이 출렁거린다.

위층에서 던진 화분이 떨어지고

나는 난간에 걸린 푸른 줄기를 순간 낚아챘다.

날개는 많이 상해 있었지만 잔뿌리와 줄기는

몇 몇 남아 있었다.

그는 깊은 혼수상태에 빠진 뒤 며칠 만에 깨어났다.

기진해 있던 입에서 뭉친 숨길처럼 광합성을 토해내고

철봉 하듯이 제 몸을 늘이는 것이 아닌가.

잎이란 잎에서는 푸른 박쥐들이 튀어나와 날아올랐다.

날마다 허공을 붙잡고 제 몸 늘여 내려오더니

우리 집 베란다를 곧 진초록으로 물들여 놓는다

잠도 자지 않고 제 몸을 늘이고 늘이는

그를 나도 모르게 그만 꺾고 또 꺾어내었다.

자고나면 생기고 생기는 매듭들

통제할 수 없는 그 생명력을 보는 건

왠지 서러운 일이었다.

어느덧 몸 수척해진 스킨답서스

그는 언제고 날아갈 태세로 내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미세먼지 없는 어느 날 위층 요란한 곤돌라 소리에

열린 창문으로 박쥐 떼처럼 그것들이

정말 날아가 버린 건 얼마 전이었다.

빈 하늘뿐이었다.

 

계간 『문파』 2021년 봄호 발표

 


 

노향림 시인

197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K읍 기행』,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 『푸른 편지』 등이 있음.  대한민국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이수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