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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은봉 시인 / 생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8.

이은봉 시인 / 생활

 

 

우리 집 거실 귀퉁이에는

무말랭이가 마르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감말랭이가 마르던 곳이다

땅콩알이 마르던 곳이다

은행알이 마르던 곳이다 구린내를 풍기며

인삼주도 더덕주도 호박덩이도 함께 마르고 있는

우리 집 거실 귀퉁이

고향을 떠난 지 도대체 얼마인가

농촌을 떠난 지 도대체 얼마인가

대도시 아파트에 살면서도

나와 아내는 여태껏 농촌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고향을 오가며 살고 있다

좁아터진 거실 이곳저곳을 오가며

오늘도 아내와 나는 습관처럼

자연에서 준비해온 먹거리들을 다듬고 있다

이것들 다 나날의 목구멍이 시킨 것이지만,

나날의 생활이 시킨 것이지만......

목구멍보다, 생활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으랴.

 

 


 

 

이은봉 시인 / 따듯한 말

 

 

말에는 다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지

차가운 말에는 차가운 마음이 담겨 있고

따듯한 말에는 따듯한 마음이 담겨 있지

따듯한 말은 사전 속에 있지 않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나날의 삶 속에 있지

밥솥의 밥처럼 말도 서로 나눌 때 따듯해지지

따듯한 세상을 위해 따듯한 말 나누어야지

국솥의 국 나누듯 따듯한 말 나누어야지

따듯한 말은 배추 속처럼 뽀얗고 부드럽지

언제나 가슴 둥그렇게 부풀어 오르게 하지

둥글게 부풀어 오르는 말을 나누다 보면

무쇠 밥솥의 찰진 밥을 나눌 때처럼

세상 둥그렇고 찰지게 익어가지 주걱 위

밀가루 반죽 젓가락으로 뚝뚝 떼서 만든

구수한 수제비 같은 말 만들고 싶지

따듯한 말로 가득한 세상 만들고 싶지

 

 


 

이은봉(李殷鳳) 시인

1953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 숭실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1984년 《창작과비평》 신작시집 『마침내 시인이여』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좋은 세상』, 『봄 여름 가을 겨울』, 『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 『무엇이 너를 키우니』,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 『길은 당나귀를 타고』 등이 있음. 제12회 한성기 문학상, 제4회 유심 작품상 수상. 2014. 제5회 질마재문학상 수상. 현재 (사)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불교문예』 주간이며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대전문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