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최세라 시인 / 너의 눈에 어리는 봄볕과 눈물을 기후라고 불렀다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8.

최세라 시인 / 너의 눈에 어리는 봄볕과 눈물을 기후라고 불렀다

 

 

공연이 끝나자 너는 절반 쯤 광택이 날아간 기타를 둘러멨다

 

굿 이브닝, 피에 중독된 노을이랄까 서늘한 괴담에 중독된 저녁이야 희부윰한 기운이 뭉쳐있는 하늘에 창백한 별이 돋아나고 있어 작별 키스를 위해 기타 케이스를 내려놓을 것까진 없어 이번 겨울엔 이 커다란 도시의 영혼 중 누구도 감기에 걸리지 않을 거야 안심해 사람들이 죽어나갈 테지 안심해 예쁘게 치장하고 누워 어떻게 죽을 건지 골몰하게 될 거야 그게 너일 수도 그게 나일 수도 그런 생각 끝엔 나쁜 천사들에게 한 모금의 독주까지 뺏기게 될 거야 떠난 마음들을 부검해야 하는

 

천사들에게도 취해야 할 이유가 있겠지

 

오늘 저녁을 위해 양초를 만들었어

대접에 파라핀을 부어 굳히고 심지에 불을 붙이면

눈동자보다 눈동자의 흔들림이 빚어내는 그림자가 커서

 

너는 울지 마

기타 줄은 갈아야 하겠더군

하나가 끊어졌지만 통째로 교체하는 게 좋겠더군

손가락 사이에서 망가지는 기타 피크는 던져 버리고

편지는 보내지 말고

 

후회라는 말 따위로 내 절망에 흠집 내지 말아 줘

 

비는 비의 감정으로 곁을 지나고

나의 멸종은 네가 떠난 뒤에만 이루어질 것이어서

창백한 별이 드리우는 그늘 아래

 

공연은 끝났고 너는 기타를 둘러멨지 아직 이 도시에는 취소된 공연 포스터들이 날아다니고 네가 연주하던 소극장의 티켓이 찢어지고 우리 추운 심장으로부터 더 추운 심장으로 공기가 하강하기 시작했다 너의 이름은 숲, 나는 끝내 알 수 없던 네 본명을 지어 불러 보았다 너의 얼굴에 감도는 봄볕과 눈물을 기후라고 불렀다

 

계간 『시산맥』 2021년 여름호 발표

 

 


 

최세라 시인

1995년 국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1년 《시와  반시》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복화술사의 거리』(시인동네, 2015)와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시와반시, 2020)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