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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태준 시인 / 작심(作心)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8.

문태준 시인 / 작심(作心)

 

 

모든 약속은 보름 동안만 지키기로 했네

보름이 지나면

나뭇가지에 앉은 새가 다른 데를 보듯 나는 나의 약속을 외면할 거야

나의 삶을 대질심문하는 일도 보름이면 족해

보름이 지나면

이스트로 부풀린 빵 같은 나의 질문들을 거두어 갈거야

그러면 당신은 사라지는 약속의 뒷등을 보겠지

하지만, 보름은 아주 아주 충분한 시간

보름은 나를 당신을 부드럽게 설명하는 시간

그리곤 서서히 말들이 우리들을 이별할 거야

달이 한 번 사라지는 속도로

그렇게 오래

 

-문태준 시인의 시집 <그늘의 발달> 중에서-

 

 


 

 

문태준 시인 / 벌레시사(詩社)

 

 

시인이랍시고 종일 하얀 종이만 갉아먹던 나에게

작은 채마밭을 가꾸는 행복이 생겼다

내가 찾고 왕왕 벌레가 찾아

밭은 나와 벌레가 함께 쓰는 밥상이요 모임이 되었다

선비들의 정자亭子모임처럼 그럴듯하게

벌레와 나의 공동 소유인 밭을 벌레詩社라 불러 주었다

나와 벌레는 한 젖을 먹는 관계요

나와 벌레는 무봉無縫의 푸른 구멍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일한 노동은 단단한 턱으로 물렁물렁한 구멍을 만드는 일

꽃과 잎과 문장의 숨통을 둥그렇게 터주는 일

한 올 한 올 다 끄집어내면 화하고 푸르게 흩어지는 그늘의 잎맥들

 

 


 

 

문태준 시인 / 은하수와 소년

 

 

푸른 수초 사이를 어린 피라미떼가 헤엄치고 있었다

그걸 잡겠다고 소매를 걷고 손을 넣은 지 몇핸가

가만가만 있어라,

따라 돌고 따라 흘렀으나

거기까지 가겠거니 하면 조금 더 가서 알을 슬고

알에서 갓 태어난 것은 녹을 듯 눈송이같이 눈이 맑았다

 

 


 

 

문태준 시인 / 한천(寒天)

-故 조지훈 시비 제막에 부쳐

 

 

   한천이 싫다지만

   나는 좋아라

 

   배를 대고 누웠다 다시 앉으니

   추웁고 맑은 하늘은 언제 오는가

 

   가을 풀벌레소리 끊어지고

   국화는 시드는데

 

   심장 같고 샘물 같은 이

   언제 오는가,

   萬山을 거느리는 나의 한천은

 

   사랑도 없이 결의도 없이

   나의 내부는 이미 욕되고

   언약은 기슭이 흙처럼 무너졌고나

 

   낡은 책을 사르고

   낙엽의 시간을 사르고

   한천은 치장을 거부하는 외외한 良心으로 오느니

 

   법라(法螺)를 들어 불며

   嶺을 넘어

   그대는 한천을 날으는

   海靑으로 다시 오라

 

   그리운 사람아, 어서 오라

   내 영혼의 기갈을 적시며

 

   한천이 싫다지만

   나는 매서워 좋아라

 

 


 

 

문태준 시인 / 8월의 포도원

 

 

시골집에 가 포도송이를 만지면

새로이 꽃모종하고 싶네

하느님을 향해 둥근 종도 치고 싶네

들바람을 안은

나직한 오므림

얹힘 위에 얹힘

수긍하는 모양새

뒤도 매끈하지

이것은 우리가 듣고 싶은 대답

빛과 물과 노을과 공기의 합작

입에 먼저 넣어줄 자식을 둔 어미처럼

손바닥으로 고이 받쳐드네

 

 


 

 

문태준 시인 / 강대나무를 노래함

 

 

빛이 있고 꽃이 있는 동안에도 깊은 산속 강대나무*를 생각한다

허리를 잡고 웃고 푸지게 말을 늘어놓다가도 나는 불쑥 강대나무를 화제 삼는다

비좁은 방에서 손톱 발톱을 깎는 일요일 오후에도 나는 강대나무를 생각한다

몸이 검푸르게 굳은 한 꿰미 생선을 사 집으로 돌아 갈 때에도 강대나무를 생각한다

몸이 검푸르게 굳은 한 꿰미 생선을 사 집으로 돌아갈 때에도 강대나무를 생각한다

회사의 회전의자가 간수의 방처럼 느껴질 때에도 강대나무를 떠올린다

강대나무를 생각하는 일은 내 작은 화단에서 죽은 화초를 내다 버리는 일

마음에 벼린 절벽을 세워두듯 강대나무를 생각하면 가난한 생활이 비로소 견디어진다

던져두었다 다시 집어 읽는 시집처럼 슬픔이 때때로 찾아왔으므로

우편함에서 매일 이별을 알리는 당신의 눈썹 같은 엽서를 꺼내 읽었으므로

마른 갯벌의 소금밭을 걷듯 하루하루를 건너 사라졌으므로

건둥건둥 귀도 입도 마음도 잃어 서서히 말라죽어갔으므로

나는 초혼처럼 강대나무를 소리내어 떠올려 내 누추한 생활의 무릎으로 삼는 것이다

내가 나를 부르듯 저 깊은 산속 강대나무를 서럽게 불러 내 곁에 세워두는 것이다

 

*강대나무: 선 채로 말라죽은 나무.

 

 


 

 

문태준 시인 / 바위

 

 

풀리지 않는 생각이 하나 있다

새의 붉은 부리가 쪼다 오래전에 그만 두었다

입담이 좋았던 외할머니도 이 앞에선 말문이 막혔다고 한다

나뭇짐을 내다 팔아 밥을 벌던 아버지도 이것을 지지 못 했다고 한다

어느덧 나도 사랑을 사귀고 식탁을 새로 들이고 아이를 얻고 술에는 흥이 일고

이 미궁의 내부로부터 태어난지 마흔해가 훌쩍 넘었다

내가 초로를 바라볼 때는 물론

내가 눈감을 그날에도 이것은 뒷산이 마을에게 그러하듯이 나를 굽어볼 것이다

나는 끝내 풀지 못한 생각을 들고 다시 캄캄한 내부로 들어갈 것이다

입술도 귀도 사라지고 이처럼 묵중하게만 묵중하게만 앉아 있을 것이다

집 바깥으로 내쫓김을 당해 한밤 외길에 홀로 눈물 울게 된 아이와도 같이

그리고 다시 이 세계에 새벽이슬처럼 생겨난다면 이것을 또 밀고 당기며 한마리 새가 되고, 외할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고, 마흔 몇해가 되고……

시간은 강물이 멀리 넘어가듯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다

 

-문태준 시인의 시집<먼 곳> 중에서-

 

 


 

문태준(文泰俊) 시인

1970년 경상북도 김천 출생. 1955년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석사학위.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 취득.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處暑〉외 아홉 편이 당선되어 등단.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2004년 〈동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2005년 〈미당문학상〉, 2006년 〈소월시문학상〉, 2014년 〈서정시학작품상〉, 2018년 〈목월문학상〉을 수상.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