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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철 시인 / 이제 너를 돌려준다
이제 너를 너에게 돌려준다.
잔광에 부서지는 산벚나무 단풍 환장할 빛깔들도 마른 잎 뒤척이는 귓불 시린 늦가을 바람소리도 산 그림자 내리는 산허리 끼고 홀로 걷는 오솔길도 높은 산 낮은 산 어깨동무 아스라한 산 능선도 능선에 걸린 하늘 층층이 물들여오는 저 노을도 이제 저들 각자에게 돌려준다.
낮밤 일교차로 의뭉스레 피어오르는 새벽안개도 안개에게 돌려준다. 너를 이리저리 뒤척이다 묵정밭 되어버린 이 내 마음도 마음에게 돌려준다.
각자 흩어져 제 뿌리로 돌아가는 이 계절 가을을 가을에게 돌려준다.
이제 그리움을 그리움에게 돌려준다.
이경철 시인 / 여름꽃
가만히 보니 개망초도 꽃이데요 바람 부는 대로 꽃이데요
가만히 보니 감자꽃도 꽃이데요 하얀빛 자주빛 바람에 날리는 꽃이데요
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나는 여직 꽃이 아니데요 건들건들 바람만 맞고 있데요
뻐꾹 뻑뻐꾹 소리에 올여름도 익어 가는데
《木川行》시학, 2012
이경철 시인 / 그리움 베리에이션
별거 아니에요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거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거 별거 아니에요 가뭇없이 한 해 가고 또 너도 떠나가는 거
별거 아니에요 바람 불고 구름 흘러가는 거 흘러가는 흰 구름에 마음 그림자 지는 거 마음 그림자 켜 켜에 울컥, 눈물짓는 거 별거 아니에요
그런데 어찌 한데요 텅 빈 겨울 눈밭 사각사각 사운거리는 저 갈대 맨몸으로 하얗게 서서 서로서로 살 부비는 저, 저 그리움의 키 높이는 어찌 한데요
해가 또 가고 기약 없이 세월 흐르는 건 별거 아닌데요.
이경철 시인 / 햇살 거풍(擧風)
툭, 툭 털어라. 초가을 환한 햇살에 거풍한다. 여름내 찌든 이불을 턴다. 털어낸 먼지들이 햇살 속에 눈부시다.
그리움에 찌든 마음을 거풍한다. 이 내 마음속 하, 아리고 쓰린 것들도 툭, 툭 털어내면 저리 눈부신 햇살꽃으로 피어날 날 있을거나.
이경철 시인 / 모과꽃 필 때
독사였던가 나는, 퍼렇게 멍든 세월 마디마디 저려오는 이 똬리 튼 옹이들. 섞여들지 못한 세상 또 무엇을 물어뜯으려 곧추 세운 모가지더냐.
살모사였던가 나는, 묵은 등걸 옆구리 뚫고 툭툭 불거져 나오는 이 신생(新生)의 잎새들. 잎도 없이 피어난 이른 꽃철 나무라는 옥빛 패륜의 고고성이더냐.
어린 계집애 젖꼭지였던가 나는, 여린 잎새 사이사이 숨어 실핏줄로 맺히는 이 철늦은 꽃망울들. 봄꽃 다 지고서야 또 무슨 죄업 지으려는 연분홍 시그널이더냐.
홍어이련가 나는, 입도 코도 다 문드러지고 나서야 제 맛 내는 썩은 홍어이련가. 옹이인지 과실인지 알 수 없는 이 투박한 열매들. 왈칵 물어뜯을 수도 없는 울퉁불퉁한 세월의 진한 향기이련가.
붉은 철쭉꽃 지나 연보라 등꽃 지나 새하얀 찔레꽃 지나 봄 꽃철 다 지나서야 모과꽃 점점 붉게 핀다.
핀다. 잎새 사이사이 숨어 피는 질긴 업보(業報) 이 가련한 기미(幾微)들,
—시집『그리움 베리에이션』(201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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