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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향림 시인 / 배꼽
꽃에도 배꼽이 있는가.
흔적 없이 죽음을 수납하는 꽃들에게는 배꼽이 자란다.
열매 꼭대기에 오똑하니 올라앉아서 방금 떨어진 저 배꼽이 향기로운 전생이었다는 것을
태를 태워 묻은 아득히 먼 고향이었다는 것을 터질 듯한 온몸으로 보여준다.
상처 아문 자리에 봄이 돋고 은빛 금빛 장신구에 보랏빛 티셔츠를 입은
제비꽃들이 일제히 만개한 배꼽들을 열고 깔깔거리는 동안
지상엔 웃음들이 수북이 쌓인다. 봄이 쌓인다.
노향림 시인 / 복음 약국
복음 약국 주인은 한쪽 다리가 짧다 일요일에도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린다 지하 주차장이 넓은 신축 교회에서 풍금 소리로 예배가 시작되고 성탑의 음악 소리는 쟁쟁하게 퍼져나간다 멀리 파문을 일으키며 퍼져 나가는 동안 그는 한 손에 신문을 든 채 굵은 테 안경 너머 졸고 있다 그의 복음은 혼자 숨어서 읽는 주기도문처럼 수직 상승해 공중 어디엔가 떠돌고 있을거라고 믿는다 한쪽 다리가 무겁게 질질 끌려도 날마다 찾아오는 비둘기에게 허물어 질듯 작은 쪽문을 빠져나와 봉투에 넣은 쌀알들을 흩뿌려 준다 그의 복음은 늘 쓰디쓴 알약이지만 신도들의 가방에 든 구원의 말씀 몇 알보다 언제나 약효가 세다 복음 약국 문은 좀처럼 닫히지 않는다 깜깜한 밤하늘의 잔별들에게도 개방해 놓고 있다
노향림 시인 / 압해도
섬진강을 지나 영산강 지나서 가자 친구여 서해바다 그 푸른꿈 지나 언제나 그리운 섬 압해도 압해도로 가자 가자 언제나 그리운 압해도로 가자
창밖엔 밤새도록 우리를 부르는 소리 친구여 바다가 몹시도 그리운 날은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섬 압해도 압해도로 가자 가자 언제나 그리운 압해도로 가자
하이얀 뭉게구름 저멀리 흐르고 외로움 짙어가면 친구여 바다소나무 사잇길로 가자 늘리보다 더 외로운 섬 압해도 압해도로 가자 가자 언제나 그리운 압해도로 가자
노향림 시인 / 압해도 8
압해도 사람들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이마받이을 하고 문득 눈을 들면 사람보다 더 놀란 압해도 귀가 없는 압해도 반 고호의 마을로 가는지 뿔테 안경의 아이들이 부는 휘파람 소리 일렬로 늘어선 풀들이 깨금발로 돌아다니고 집집의 지붕마다 귀가 잘려 사시사철 한쪽 귀로만 풀들이 피는 나지막한 마을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압해도를 듣지 못하네.
-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1992)
노향림 시인 / 만 3
명량 대첩지 울둘목 수심 깊은 물속은 바닥으로 갈수록 소용돌이친다. 그 거친 물살은 겨울 숭어 떼의 아늑한 안방이다. 그곳에만 놀다가 눈에 백태가 끼고 눈멀어진 봄날엔 수 천 수 만 마리의 군단으로 몰려서 물이 얕은 쪽으로만 헤엄친다. 이따금 리더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길목을 지킨 낚시꾼에게 그만 들킨다. 잠을 안자며 다음날 새벽까지 한곳만 응시하던 뜰채 낚시꾼에게 꼼짝없이 당하고 만다. 불과 일 이 초의 순간의 포착, 그들이 지나는 물길만 숨죽여 지켜보다가 흰색 몸뚱어리를 보는 순간 휙 낚아채 버린다. 뜰채에 두 세 마리 씩 건져 올려지는 숭어들 이놈덜, 지요 지요 하고 항복하면 놓아 줄턴디, 이 순간 니들 헌텐 바다가 苦海여 뜰채 속에서 발버둥치는 숭어들을 보며 낚시꾼은 미안하다는 듯 한마디 뱉는다. 숭어 떼의 몸부림에 바다가 요동친다. 뜰채 낚시꾼도 바다에 낚일세라 그 뒤에서 잘 꼰 헝겊노끈으로 서로의 허리를 묶었다. 일행이 배낭에서 도마와 칼을 꺼낸 뒤 순식간에 회를 떠 초고추장 찍어 맛을 본다. 싱싱한 봄날 새벽이 토막 난 횟감처럼 희뿌옇게 공간을 넓히고 섰다.
- <현대시학> 201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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