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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지 시인 / 레몬옐로
집 나간 마음이 되돌아오면 식구들끼리 하얀 옷 해 입고 깨끗한 식당에 가서 외식이라도 해야지.
집에만 처박혀 있는 쓸쓸한 개를 앞세우고 그 널찍한 등짝을 쓸어주면서 가까운 유원지에 소풍이라도 가야지.
그러나 마음이 되돌아오면,
하늘은 또 알타이어족의 언어로는 표현할 길 없는 이 세상에서 나만 아는 노란빛 되어 내 방의 창문을 물들이고 나는 다시 뾰족하게 성을 내는 아이가 되겠지. 벼락이거나 장대비겠지.
마음이 되돌아오면 화를 내다가 우는 아이가 되겠지.
― 시집 『레몬옐로』(문학동네, 2018)
장이지 시인 / 어떤 귀소(歸巢)
해삼위(海蔘威) 부근 상설시장 누비 구름 누덕누덕 걸린 하늘, 두만강 가는 길 묻고 다니던 꽃제비 한 아이 이국의 장날을 썩은 감자껍질 같은 것이나 줍느라 진종일 바장대다 길 위에 눕고 고려인 장사치가 호떡을 가져왔다 잠시 집으로 가는 후줄근한 꿈 여행을 들여다보고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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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물결 소리도 귀에 먼 해삼위 부둣가 낡은 집 전쟁 통에 가족들 뿔뿔이 흩어져 중원의 모래바람으로 아무렇게나 살다가 이제는 까라져 가죽만 남은 노인이 코리아의 호드기 소리를 난청으로나 듣는 밤, 민족이란 말도 요새는 없다는데 고국산천에 쓴 무덤의 냄새는 꿈에서 더 간절하기만……. 돌아가기는 갈 것이다. 그러나 이 몸을 다 갈아 없애고서야.
아리랑― 분노는 차가운 땅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내 얼리고 고독은 막걸리 항아리에 함께 담아라. 설움은 행랑방에 주저앉혀 짚신이라도 삼게 하고 그리움은 아무래도 잔월효성에게나 떠넘겨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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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치를 따라 우수리로 밀려 온 꽃제비 도토리묵 먹던 접시에 기러기 울어 예며 날았다. 걸핏하면 잘 울었다는 저 박용래의 어느 시에서처럼. 탈북 하여 떠돌다 아버지 병들어 죽고 모친 있는 고향으로나 돌아가야 한다고 보채다 밤사이 인사도 없이 떠나다, 꽃제비여! 연해주의 모든 길을 허리띠에 묶고 질질 끌면서 마침내는 어머니에게로 갈 까마귀 같은 아이. 연해주의 찬 하늘에 가족 잃은 설움을 밀어두고야 짓무른 꿈을 베갯잇에 적시는 노인. 아리랑은 유형(流刑)의 노래던가. 고려인 장사치가 치켜다본 새벽하늘엔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둥근 달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눈부신 흰 머리로 짜낸 정안수 그릇으로 아슴하기만.
장이지 시인 / 굳세어라 금순아․1 ―국제시장 1955, 눈꽃
국제시장 입구 오망이 꿀꿀이죽 무쇠 솥 위로도 허기진 눈꽃이 풀풀 날리느니, 먹어도 배가 채워지지 않는 밥이 내리느니.
금순아, 하늘에 파랗게 언 네 얼굴. 바다에 살얼음 깐 거울을 보고 있느냐. 흥남 부두 엘에스티 고동 울리는데 빙경(氷鏡) 속에서 돌꼇잠을 자는 시간이여.
울어도 울어도 시원해지지 않는 검은 바다. 얼어서 검어진 네 손에 입김을 불던 오라비를 찾느냐. 그 꽝꽝한 거울 속 눈보라를 헤치며, 헤치며.
파도가 살갗을 에는 바다에 너를 버리고 삼팔따라지로 구르고 굴러 국제시장이다. 달러 장사치이다. 쪽을 찐 호남 안깐을 너처럼 안고 숨죽여 울던 밤이여.
가늘한 허리의 안깐을 보면 울컥 일던 대설원의 눈보라여. 대구나 광주, 너 어디 살아있는 게 아니냐. 엄동설한을 마른 풀로 헤매었더냐.
씩씩거리며 멧돼지 숨을 쉬던 술판도 숱했다. 치받고픈 타향살이, 눈꽃 너머 장진 부근을 더듬느니. 그래, 눈꽃의 훈훈한 살결로 너 웃으며 장진에도 내리느냐. 쌓이느냐.
장이지 시인 / 굳세어라 금순아․2 ―파줄기처럼 매운 길 1960, 서울
눈매 서글서글하고 풍신 좋은 남정을 따라 산으로만 재우쳐 얼었던 밤, 눈물나우다. 중공군 꽹과리 소리 오금 저리고 언 발 끌며 걸은 길 파줄기처럼 맵더이다.
남정네 서산을 가는 새 되어 뜨고 양파알처럼 떨군 아이 등에 업고 미싱을 돌리고 날품을 팔고 드난을 살아도 서울 하늘은 맵기만 하오.
오라바이, 간밤 꿈에 만났쟁이오. 학업을 이었으면 대학을 앙이 나왔갔나. 학사모 쓰고 검은 옷 입고 내 손을 쥔 손 놓지 않고 장진으 가겠쟁이.
하늘도 이념이 달라 넘질 못하는 휴전선, 구름도 덜컹 넘어야 하느니. 그래, 꿈도 가다가는 가물어 목 끝이 타는 검은 방 오라바이 냄새 훗훗이 떠돌고, 곤한 아이 숨소리.
서울의 봄, 개나리 피었다 지는 4월이여. 어깨에 옥양목 빛 날개를 단 학생들이 밀려가다가는 썰물 지는 오후. 피 흘리는 어깨를 움켜쥔 나 어린 오라바이를 보겠네. 날개 찢긴 나비 깃들이어 오는 소리. 흉악한 세상이오, 얼피덩 들어와 숨기오.
울 오라바이라면 얼매나 좋갔나. 바다도 새카맣게 질린 흥남 부두에 눈보라 채찍으로, 채찍으로 날리던 날, 내 쥔 손을 왜 놓았는지 묻지도 않고 개마고원의 그늘 같은 마음에 꼭꼭 숨겨드리리. 이념이 와도 모르고 독재가 와도 모르게시리.
상처에 좋은 곰국 손수 끓여 내 이남살이의 파줄기 같은 설움도 숭숭 썰어 넣겠네. 어리신 오라바이는 신고산 타령을 불르우다. 아바이 태가 나나 봅새.
죽지 않고 산다면. 죽지 않고 어딘가 산다면.
장이지 시인 / 굳세어라 금순아․3 ―뜬 배 1983, 타령조
찻머리에 거룻배 떠간다. 버스는 아니 오고 너를 태운 배가 흘러간다. 너는 오십줄 오망이 얼굴을 닮았었구나. 설마 함경도 사투리도 다 잊어뿌리고 가느냐.
“오라비를 많이는 기다렸싱께. 돌이 되았는갑드라. 암이었다카지러.” 금순아, 개마고원 머리에 얹힌 흰 눈의 소복을 입고 너 어디에 가느냐.
좀 더 기대리쟁쿠, 너의 손을 주라. 너의 거멓게 언 손을 주라. 전단을 뿌리고 신문광고를 내고 테레비에도 나갔다. 전라도를, 충청도를, 강원도를, 여의도를 사무친 바람.
이마에 검정 사마귀 있는 안깐을 찾았다. 금순이를 찾았다. 살았다니 멈출 줄 모르던 마음이여. 갈증의 야반, 수화기 저편에서 울던 황해도 처니의 울음고비를 어디 다 넘갔나. 네가 아닌데도 울음이 터졌다. 네가 아니어서 울음이 터졌다.
동명이인을 만났다. 고향사람도 만났다. 그리고 너를 아는 사람을 찾았다.
“조카가 있지러.” 옛꼬망? 중동에 가 있다고 했다. 조카는 붉은 혀에 흰 모래가 박히도록 울지 않았겠느냐, 좀 더 기대리쟁쿠.
너는 거룻배를 타고 떠간다. 장진호에 깃들인 이마 하얀 별은 너의 별. 인제는 너 다 보겠구나.
오십줄 오라바이의 망이는 가문 손이며, 너를 놓은 부끄러운 손이며, 타국 땅 모래바람 속 푸른 작업복들을 입은 코리언, 늬가 조카를 찾을까.
어랑 어랑 어허야 어야 디야 내 사랑아. 공산야월 아바이 타령 소리. 두견 두견 오망이 잔기침 소리. 고향산천을 다 보겠구나. 망이는 변했갔지? 큰 산이 전설같이 떠오르고 둥주리 튼 마을, 울렁거리는 함경도 사투리의 아이들 지줄거림…….
어랑 어랑 어허야 어야 디야. 너의 차가운 손을 주라. 네 손을 잡은 손 두 번은 놓지 않으리. 놓지 않으리.
장이지 시인 / 좀삐의 여인들 ―종군위안부의 넋이 '당신'에게
‘좀삐’에 눅진한 비가 내린다. 열대 우림 속에선 부리가 크고 긴 괴조(怪鳥)가 온종일 울어댄다. 문턱에 선 거대한 팰루스의 그림자. 다다미방에 이불이 한 채, 몸살이 눅눅하게 웅크린다.
가족을 죽인다고 해서 온 여자도 있었다. 속아서 따라온 여자도 있었다. 가난에 팔리고, 동족에 속고, 전쟁이 까맣게 먹어치운 이름도 없는 여자들이 있었다.
마마상이 군표를 챙기고 담배를 피워 문다. 일본도를 차고 군화를 신은 야수들이 하얀 지옥을 자꾸 파먹는다. 파먹는데도 죽을 수가 없어서 기절한다. 열대우림의 미지근한 비가 치적치적 침을 뱉는다.
폭격의 와중에도 안기러 오는 원숭이들이 있었다. 고참에게 딸려 와 열여덟 동생의 얼굴로 범하고 간 젊은이를 용서한다. 하루에 열 명, 아니 그 이상, 죽음을 등에 업은 벌거숭이들이 두려움으로, 두려움으로 파고 들어간 날에도 죽을 수가 없어서 까무러친 ‘좀삐’의 여인들. 어디선가 엉겅퀴 달이는 냄새가 난다.
전신(戰神)의 아이들이 흐물흐물한 핏덩이로 쏟아진다. 음문 속으로 독거미들이 들어와 온 몸에 독이 퍼진다. 일본도가 아랫배에 상처를 내고 간다. 린치가 말라리아 모기처럼 앵앵거린다. 생리혈이 멈추게 하는 수술실의 메스, 제국주의의 포신이 서서히 움직인다.
문득 우기가 지나고 다시 우기가 오고. 구멍 뚫린 천장으로 하늘의 별이 떨어지고 남자들의 전쟁이 끝나고 역사가 불태워지자 아지랑이가 되었다, 몸이, 엉겅퀴 달이는 냄새가 아직도 나는데 용서할 권리마저 없이 아지랑이가 되었다.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다다미방에 이불이 한 채. 무너진 천장으로 쏟아지는 별빛에도 몸살이 날 것 같은데, 여기는 어디인가. 내 이름은 무엇인가. 당신이라면 모든 것을 말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당신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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