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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아 시인 / 이상한 활주로
나는 토성의 고리, 여섯 번의 비명을 지르는 나는 멀리 던진 부메랑, 새들의 이마에 부딪히며 안녕 나는 때로 읽히는 책, 꿈의 허리를 쓰다듬는 나는 귓속에 펼쳐진 지도, 낯선 음표들의 동굴 나는 분홍 뺨, 거짓말들의 사탕봉투 나는 한밤의 괘종시계, 불면을 배달하는 나는 해질녘의 그림자, 긴 목으로 인사하는 나는 토끼, 앞니로 뜀박질하는 나는 빨래집개, 햇살의 부푼 배를 깨무는 나는 불협화음, 아픈 아가를 위한 자장가 나는 계단, 오직 뛰어내리기 위해 오르는 나는 여름, 우산과 장화의 날들 나는 바람개비, 은밀하게 미친 나는 타이밍, 어긋나기 위해 태어난 나는 창문, 노크는 금물 나는 마법사, 검은 모자에 손을 넣는 순간을 사랑하는
『로라와 로라』, 심지아, 민음사, 2018, p.15
심지아 시인 / 빈칸의 경험
빈칸에 눕는다 나는 눕는 것을 좋아한다 눕는다 라는 말은 나보다 천천히 눕는다 눕는다 라는 단어가 가로등처럼 곳곳에 서 있는 것을 본다
눕는다 라는 말에 불을 밝혀 본다 하나하나 꺼트린다 나타났다 사라지렴 스르르 누우렴
눕는다 발음할 때 주어의 빈자리는 천천히 눕고 천천히 일어난다 양옆을 바라본다 목적어의 빈자리를 천천히 눕히고 천천히 일으킨다 몸은 늘 어떤 각도를 이룬다
빈칸에 눕히고 싶은 것들을 생각해본다 하지만 빈칸은 혼자 눕기 좋다 한 칸 한 칸 채우고 싶지는 않구나 그것은 고독을 연결하는 방식도 고독을 해체하는 방식도 아니다
빈칸에 풀씨가 날아와 자라 줄래 이것이 오늘이 하는 말이다 오늘은 비어있다 오늘이 오늘에 눕는다 오늘은 가로등처럼 곳곳에 서 있다
빈칸에 텅 빈 개가 와 가려움을 뜯는다 가려움은 오래 되었고 가려움은 어리다 빈칸에 어린 가려움이 와 먼 행성을 바라본다 텅 빈 염소의 수염이 빈칸은 다음 칸으로 번지지 않는다 빈칸은 닫히지도 열리지도 않는다 빈칸에 누워 나는
까끌까끌해진다
- 시집『로라와 로라』(민음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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