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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재운 시인 / 백야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5.

홍재운 시인 / 백야

 

 

그 어떤 행위도 표정도 들리지 않았다 지하에 숨은 내 울음엔 바닥도 없고 나뭇가지도 없고 정수리에 감추었던 흉터들이 일제히 입을 벌렸다 짧은 소리가 몸을 꿰뚫었다 새들이 떨어지며 빛이 울었다 그러니까 아스피린, 뼈를 깎아 심장을 비우는 고목나무, 진화하지 않은 밤들이 뺨을 후려치며 천개의 팔을 잘랐다 꾹 다문 이빨들이 잡은 손을 놓쳤다 모래들이 휘몰아치는 방향으로 깨진 몸들이 돌고 있었다

 

들리지 않아서 없는 내부가 백 년 더 깊어졌다

 

 


 

 

홍재운 시인 / 새벽

 

 

물방울이 의자에 앉아있다라고 생각한다 길어진다라고 생각한다 생각은 다리와 손이 없어서 없는 몸뚱이만 흔들려서 멀다고, 날아간 밤을 생각한다 애초에 명왕성이었다고 생각한다 바람을 숭배하는 자작나무, 겨울을 지고 걸어갔다고 생각한다 그는 투명한 유리혈관, 새, 라고 쓰고 벽이 묻는다 잿빛 허공으로 날아간 새들이 흘러내린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목요일을 따라 목요일의 수요일, 구겨지던 물방울들, 찔래꽃이라고 생각한다 문득, 일어선 자리에서 모퉁이가 모퉁이를 따라 돌고 있다

 

 


 

 

홍재운 시인 / 쇠사슬

 

 

그러니까 오늘은 껍질을 의미하죠 붉은 흔적을 닮아가는 벼랑에서 오늘은 더 멀어져야 해요 모퉁이를 돌아간 만큼 들려오는 표현이 좋아, 겨드랑이에 한쪽 팔을 감추고 나머지 팔을 더듬어가는 중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입구가 구불거리며 넘어갑니다 무덤 위로 내리는 빗방울이나, 벽이 없는 터널, 푸드득 날아가 버린 다리들, 흘러간 시간 쪽으로 기울어진 무늬가 인사처럼, 울음처럼, 뱉은 뼈들을,

 

그러니까 이 검은 문장들을 어떻게 발음해야 할까요 나는 꽉 다문 배꼽을 열고 또 다른 배꼽을 향해 엎드립니다

 

 


 

 

홍재운 시인 / 11월

 

 

가을밤 추락하는 빗방울에 뼈가 있다 그것은 소리의 뼈, 뼈가 되지 못한 빗방울들은 연대의식이 필요하다 빗방울에 담긴 눈빛은 평형감각을 잃었다 추락하는 11월의 녹슨 눈빛이다 표정을 숨긴 모습이다 한 방울의 덩이로 그가 사라지는 순간, 어둠의 허공초차 흐믈흐믈 해 보이는 또 다른 눈빛의 뼈를 보았다 겹쳐지고 흩날리는 자정이다 그들은 도풀갱어, 날카롭게 녹아내리는 자리마다 뼈들의 뼈, 얼룩 같은 뼈, 주머니가 미어지도록 질주하는 빗방울들이 멈추지 않는다 빗소리가 불경처럼 내 등을 후려칠 때가 있다 가을밤은 얼마큼의 깊이와 젖은 나뭇잎으로 가능할 것인가 그 가능함이 사라진 내 마음에서 한 방울씩 불가능이 가늠될 때, 자정은 젖은 얼굴을 끌고 가을 깊은 바닥으로 뼈들을 수장시키고 있었다

 

 


 

 

홍재운 시인 / 암호

 

 

이 행성의 숫자들은 모두 액체와 주파수가 맞지 않는 채널 사이에 있다 어둠은 흘러 어둠이 되기 이전의 숫자로 되돌아간다 오늘 24는 23이 빠져나간 25다 7이전에 사라진 8이다 꿈은 꿈이기 이전에 불가능함을 역설한다 가능함이 잠들지 못하는 머리카락으로 흐믈흐믈 숫자들이 녹아내린다 창문은 닫혀있고 닫힌 창문은 너무 멀리 있다 나에게 창문은 바람이다 숫자들이 모두 액체는 아니지만 때로 단단한 목구멍을 타고 오르다 사라진 유성을 향해 흘러내린다 바람이 빠져나간 11이다 숫자 11은 끊임없이 젖은 9를 향해 흘러간다 숫자가 지나가는 방향은 언제나 꿈이 지나가는 행성을 향해있다 어둠이 겹쳐지는 길목이다 무중력 상태의 모퉁이는, 액체성감각이 닿으려는 곳은, 어느 숫자에도 나누어지지 않는 별의 심장이다 숨결조차 들리지 않는 표정 0이다

 

더 이상 담을 수 없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홍재운 시인 / 길

 

 

내 허리를 감아 도는 길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은 비포장도로였다 돌멩이들이 성난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계절이 네 번 바뀌는 동안 길은 휘어지고 갈라져 종아리를 지나 목덜미까지 단단해지고 내 길의 근육이 한 움쿰씩 뭉쳐지곤 하였다

 

길을 따라 뛰는

길의 등줄기를 힘껏 밟을 때

 

아침을 향해 피는 나팔꽃의 이름을 나는 혼자서 부르며 뛰어야만 했었다 새벽 어디선가 나는 하얀 성의를 입은 천사들이 길의 가장 먼 곳에서부터 내려와 얼룩진 돌멩이들의 얼굴을 감싸 안는 것을 보았다

 

 


 

홍재운 시인

강원도 춘천 출신. 2005년 계간 《시와 세계》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정자역 지나 오리역에도 비가 흐른다』와 『붉은 뱀을 만나다』『오늘 비가』가 있음. 제12회 이상시문학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회원, 문학미디어 취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