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설태수 시인 / 우주, universe*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5.

설태수 시인 / 우주, universe*

 

 

우주는

하나의 운문.

침묵을 깔고 있는

시.

하나의 노래다.

소리의 그림자도 있는

우주는

지금 노래다.

 

* uni- : 하나, 일(一), 단(單)의 뜻 verse : 운문, 시

 

 


 

 

설태수 시인 / 기차, train

 

 

수평으로 달리는

비.

칸칸마다

사람마다

눈물 한 드럼씩 안고

긴 굴도 통과하는

비.

빗방울들.

 

 


 

 

설태수 시인 / 나비, butterfly*

 

 

집 나설 때

아내는 손 흔들었지.

저만치

팔락팔락 날고 있는 나비.

순간순간 길 꺾으면서

그러나, 그러나, 하면서

어디로 떠나는가.

바람 올라탄 휴지조각.

능소화 꽃줄기는 휘청.

나비 떠난 허공에

골목길 보인다.

꺾이고 꺾인 길들.

천적 따돌리는 길이다.

목적지까지

버스길도 여러 번 꺾였다.

 

* but : ‘그러나’의 뜻으로 기존의 것을 부정. ‘꺾는다’는 것도 그와 유사한 맥락임.

 

 


 

 

설태수 시인 / 시계, clock*

 

 

잠궈!

잠궈!

지난 것은

잠궈!

깨끗이 잊어!

 

그래도 돌아보면

지난 일들 빼곡이

나를 받들고 있다네.

빛바랜 슬픔도 있다네.

 

* lock : 잠그다.

 

 


 

 

설태수 시인 / To·day : 만경창파

 

 

‘오늘’은 ‘낮’(day)에 속한다.

밤은 낮의 그림자.

밤에다 빨대 꽂은 낮.

보고 또 보는 에너지 진원지는 밤.

누구나 꿈의 행방은 알 수 없어

서로가 까맣게 낯설다.

부부 사이건 혈육 사이건

티끌만한 간섭도 불가능한 잠의 세계.

밤새 이별했던 나를 찾아

오늘을 나선다.

언제나 보이지 않는 등짝으로

당신을 겨냥한다.

숨결마다 오늘을 핥는다.

낮과 밤의 통로, 바람은 보이질 않아

쫓거나 쫓길 것 없다.

만경창파.

오늘을 잔치한다.

 

 


 

 

설태수 시인 / 시시시시

 

 

꾸물꾸물한 비구름 보다가

이면지에 ‘시’자를 이쑤시개로 새긴다.

일렁이는 시시시시

나무들 소리가 잠복해있을까.

나무에서 나온 종이.

결코 중요하지 않으면서 전부인

벌레들*한테서 나무는 나온다.

별과 별 사이는

원래 나무가 있었던 자리다.

 

지평선에 얽히지 않는 문법으로*

울퉁불퉁해지는 먹구름.

번쩍, 우르릉 쾅

우왕좌왕 대나무 숲,

시시시시 시시시시

비 냄새는 골수로

글 줄기는 비안개 속으로,

 

W. S. Merwin, “After the Alphabets”에서.

 

 


 

 

설태수 시인 / 멍든 바다

 

 

눈 내린 산의 검은 능선들이

산을 붙들어주는 그물로 보인다.

크고 작은 계곡과 물줄기도

물이 흐르는 그물망이다.

지구 스스로 뱅뱅 돌면서

태양 둘레를 씽씽 돌고 있어도

모래알 하나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시냇물과 강줄기에 닿는

그대 눈길 덕이다.

이어진 모든 물줄기

마침내 바다에 닿아 있는 것은

허무에 멍든 지상의 아픔을

바다가 받아주기 때문.

할 말 다 못하고 제 몸 철썩이며

푸르게 푸르게

받아주기 때문이다.

 

 


 

설태수 시인

1954년 경남 의령 출생.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및 동 대학원 영문과 졸업.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열매에 기대어』, 『푸른 그늘 속으로』, 『소리의 탑』등이 있음. 공간시낭독회 상임 시인. 성균문학상 수상. 현재 세명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