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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비 시인 / 로봇청소기
예약된 또 하루가 조용히 눈을 뜬다 친구가 없는 나는 은둔형 외톨이 사람들 떠난 냄새가 마르기를 기다린다
간단한 질문에는 표정 없이 답을 하고 사지를 웅크린 채 어제를 찾아가며 먹어도 자라지 않는 바코드를 읽는다
분주한 발소리가 문밖에 흩어지면 내 속에 숨긴 나를 찾을 수 있을까 남들은 내 머릿 속을 먼지 통에 빗댄다
혼놀*은 내 운명에 새겨진 검은 지도 익숙한 외로움이 틀 안에 맴을 돌 때 재빨리 몸을 숨기고 충전대로 향한다
*혼잣 놂, 또는 그렇게 하는 놀이
<<혼인 비행>> 발견 2020
김나비 시인 / 거꾸로 자라는 새
처마 밑 날개 없이 매달린 서늘한 새 소리 없는 소리로 퍼덕이는 고드름 네 몸속 어디쯤에서 세상은 얼어있나
햇볕을 받으면서 거꾸로 키 세울 때 날 수 없는 시린 새는 조금씩 자라나고 지붕엔 검은 소문이 차갑게 흘러든다
얼어가는 네 칼날은 바람 편에 있는 걸까 맑은 독 마시면서 시간을 가둘 때 풍경은 처마 밑에서 온몸을 두들긴다
솟구친 찬 겨울이 뜨겁게 녹아갈 때 온몸을 날리면서 폭발하는 투명한 새 애끓는 흔적 말리며 흔적 없이 날아간 너
김나비 시인 / MPD(다중인격장애)
포르말린 가득 찬 유리병을 본 적 있니? 시간을 베고 누운 병 속의 표본처럼 내 몸속 수많은 사람 보관되어 있지.
네모난 구멍들이 뚫려있는 몸통에 각진 불이 켜지는 한밤이 찾아오면 사람이 꿈틀거리는 유충처럼 보이지.
몸속엔 살인범도 그를 쫓는 형사도 살지. 술병의 병목 부는 나팔수도 하나 있지. 심장엔 물방울 같은 아이들이 뛰어 놀지.
바람이 어깨 펴고 옆구리를 치고 가면 철커덕 휘청이며 키를 높이 세우지 가슴에 현대아파트 이름표가 반짝이지.
2019 부산일보 신춘문예당선 시조
김나비 시인 / 물의 거짓말
머리칼이 아다지오 보폭으로 피어나고 있었던 거다 하얗게 자라는 머리칼은 강이 밀어 올린 희미한 핏줄 온몸에서 돌던 하얀 피가 세상에 뿌려진 것 머리칼이 자라는 것을 보기위해 모여든 새벽의 게슴츠레한 눈에도 피는 뿌옇게 차 오른다
더 이상 가벼울 수 없을 때 담쟁이처럼 발을 뻗어 도시로 날아가는 화려한 물의 거짓말
도시를 점령한 머리칼이 도로를 닦으며 걷는다 폐지 줍는 노인의 리어카 바퀴를 지우고 가로등의 하체를 친친 감는다 등불은 거슴츠레한 눈빛으로 없는 다리를 찾는다
강이 머리를 움켜쥘 때 마다 울컥이며 세상으로 수혈되는 안개
하얀 머리칼이 떠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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