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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철수 시인 / 竹기까지 외 10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8.

문철수 시인 / 竹기까지

 

 

뿌리를 뻗을 때마다

마주하는 통증을 기억하려

지상에 건물 한 층 올린다

외벽은 푸른 자존심

내벽은 투명한 종이로 도배하지만

입주는 절대불가

꺾이지 않으려 휘청이면서도

죽음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가슴을 열어 바람을 들인다

내벽을 떨어져 나온 발효된 통증

누렇게 툇마루를 노닌다

 

 


 

 

문철수 시인 / 부부

 

 

방안에 들어앉은 화목 난로가

조그만 관심을 벗어나면 식어버린다

 

난로 안을 들여다보던 아내가

통나무 하나를 더 집어넣는다

 

하나밖에 없으면 잘 안 타

두개는 돼야 등을 기대고 잘 타지

 

 


 

 

문철수 시인 / 시를 쓰다

 

 

고목에 파편처럼 박힌 옹이

사투 끝 짜내지 못한 고름

 

네가 토한 삶의 비늘들은

살을 가르고 꺼낸 네 골수

가슴 속에서도 머물지 못하는

하얀 거즈에 배어드는

금빛

사투의 흔적

 

새벽녘 몸부림 끝 구겨진

발기하지 못하는 원고지더미

 

 


 

 

문철수 시인 / 제기랄 시론

 

 

밥같이 경험하고

똥같이 써라 쓰고

길고 긴 사족을 달다가

 

근데,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한가 싶어

썩은 무 썰 듯 버린다

 

시는

그저

밥같이 경험하고

똥같이 쓰는 것일뿐

 

 


 

 

문철수 시인 / 바람의 이력서

 

 

지나온 길을 기억하지 않는다

지나온 날을 기록하지 않는다

지나온 삶을 기념하지 않는다

 

 


 

 

문철수 시인 / 구름의 습관

 

 

밤새, 바람은 구름을

산골짜기 마다 심어 놓았다

순면 생리대 같은 구름은

까닭도 모른 채 골짜기 마다

납작 엎드려 졸고 있다

바람은 짐짓 외면하고

중천 태양도 지쳤는지 숨어버린 한낮

젖은 도로를 더듬는 타이어는

찢어지는 듯 얕은 신음만 뱉고

바다는 숨소리 거칠다

누구는 물안개라 하지만 본질은 같다

다만 다른 습관이 있다면

바람의 외면을 견디지 못하고

거칠게 세상을 흔들기도 한다는 것

마음이 무거워지면 울컥 쏟아내고

투명하게 사라진다는 것

 

 


 

 

문철수 시인 / 외돌개

 

 

네겐 아름다움이겠지만 내겐

아픔이다

통증을 견뎌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바람 앞에

나서지마라

 

 


 

 

문철수 시인 / 마음

 

 

들고 있으면 너무

무겁고

 

내려놓으면 너무

가벼운

 

 


 

 

문철수 시인 / 거울을 보는 법

 

 

세상을 등지고 산 속에 산다는

일명 자연인이 나무에 거울을 걸었는데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단다

나무가 조금씩 자라면서 거울도 높아진 것

그럼에도 그 거울을 내려 걸지 않는 건

쳐다보려 다가서지 않고 한 발 두 발

물러나면 자기 몸 하나 쯤 볼 수 있어서

나무는 키로 크지만

사람은 마음으로 크는 것

 

 


 

 

문철수 시인 / 사랑론 2

 

 

새로운 노동에 길들려면

써보지 않은 근육을

만 번이나 뒤척여야 한다

 

새로운 사랑에 길들려면

깃든 적 없는 낯선 마음을

만 번이나 흔들어야 한다

 

네게 그 사랑은

그렇게 찾아온 것이다

 

 


 

 

문철수 시인 / 상고대

 

 

청송을 지나 영덕의 하늘로 전입하는 시간

물속에 발을 담근 나무들 옷을 벗었다

계곡이 막히고 물길이 막히면서 뛰어오르던

물고기마저 사라진 후 아랫동네 소식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않았다

바람마저 댐에 부딪혀 허공으로 솟고

나무는 수위가 높아지면서 물족쇄에 묶여

껍질 벗겨져 죽음의 옷을 입었다

잎을 키우던 그리움 대신 젖은 몸을 가졌다

어느 날 부턴가 천상의 부고가 잦아들고

동상으로 온몸 얼어붙으면 그때마다 사람들

하얗게 피어오른 미련 또는 그리움을 찍는다

아픔을 인화시킬 기술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하여 외로운 사람은 옷을 벗고

그리운 사람은 겨울마다 흰 꽃을 피운다

 

 


 

문철수 시인

1960년 서울에서 출생. 시집으로  『부드러운 과녁에 꽂힌 화살은 떨지 않는다』(2009. 청동거울) 등이 있음. 〈서안시〉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