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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식 시인 / 초식동물
장사 끝난 죽집에 앉아 내외가 늦은 저녁을 먹는다 옆에는 막걸리도 한 병 모셔놓고 열 평 남짓 가게 안이 한층 깊고 오순도순해졌다 막걸리 잔을 단숨에 비운 아내가 반짝, 한 소식 넣는다
― 죽 먹으러 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순한 거 같아 초식동물들 같아
내외는 늙은 염소처럼 주억거리고 한결 새로워진 말의 밥상 위로 어둠이 쫑긋 귀를 세우며 간다
고증식 시인 / 아내의 종종걸음
진종일 치맛자락 날리는 그녀의 종종걸음을 보고 있노라면 집 안 가득 반짝이는 햇살들이 공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푸른 몸 슬슬 물들기 시작하는 화단의 단풍나무 잎새 위로 이제 마흔 줄 그녀의 언뜻언뜻 흔들리며 가는 눈빛, 숭숭 뼛속을 훑고 가는 바람조차도 저 종종걸음에 나가떨어지는 걸 보면 방 안 가득 들어선 푸른 하늘이 절대 공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제 발걸음이 햇살이고 하늘인 걸 종종거리는 그녀만 모르고 있다
고증식 시인 / 가을 운동회
만국기 나부끼는 하늘에 하낫, 뚤, 하낫, 뚤, 측백나무 울타리를 타고 넘던 선생님의 마이크 소리 개선문 뒤에 몰려 재재거리던 여린 병아리들 틈으로 사르락 사르락 금실 같은 햇살 속을 걸어 어머니 오신다 쓰윽, 무명 치맛자락 문질러 온 붉디붉은 사과 한 알 나는 어머니 거친 손마디가 너무 부끄러워 줄 속으로 더 깊이 숨어버렸다 한참이나 허공을 떠받들고 있던 손길에 그 날 이후 목구멍에 걸려버린 서러운 사과 한 알
고증식 시인 / 바람의 간이역
다시 돌아와 서 보라 삼랑진 에둘러 낙동역으로 그대 두고두고 마르지 않는 그리움 한 자락 깔려 있나니 연착된 세월을 이고 선 이끼 푸른 역사(驛舍) 하나 먼데 손님처럼 열차는 오고 남실남실 훈훈한 입김으로 바람 먼저 달려와 안기는 곳 거친 눈빛 잠시 내려놓고 보라 상처난 영혼들 미풍에 흘러가나니 거기 고여 있는 가을볕 건져 탁배기라도 한잔 걸치면 떠나간 시절들 되살아오고 세월은 또 완행열차에 실려가나니
고증식 시인 / 기차를 타고
기차를 타고 가면서 본다
늘 지나치던 저 겨울 숲도 훨씬 깊고 그윽하여 양지바른 산허리 낮은 무덤 속 주인들 나와 도란도란 햇살 쪼이며 앉아 있고 더러는 마을로 내려와 낯익은 지붕들을 어루만져주기도 한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보면
살아 있는 것만 빛나는 게 아니다
가볍게 떠다니는 영혼들이 햇살 속에서 탁탁 해묵은 근심을 털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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