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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명림 시인 / 황금산 매화나무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9.

김명림 시인 / 황금산 매화나무

 

 

어쩌다가 그녀는 이곳까지 흘러왔을까

황금黃金을 찾으러 왔다가

바닷물이 길을 막아

오도 가도 못하고

홀아비 뱃놈과 살 섞고 살았던 건 아닐까

고기잡이 떠난 서방 돌아오지 않자

평생 바다를 바라보며

해풍海風에 뼈 깎이고

기다림에 병이든 것은 아닐까

가던 길 멈추고

사연이나 들어보자며

그녀의 깡마른 어깨를

살며시 잡았더니

하얀 눈물꽃 주르르 흐르네

 

* 충남 서산에 있는 바다를 끼고 있는 산 이름

 

 


 

 

김명림 시인 / 간격

 

 

앞서 가는 엉덩이 바싹 쫓아

산을 오르는데요

 

뿡뿡 뿌뿡 뿌뿌뿌

갑작스런 따발총 소리

향기로운 꽃향기

콧속 깊숙이 스며드는데요

 

앞 사람과의 거리

산행법규 위반한 죄로

애매한 코만 꼭 쥐고

헉헉, 산을 오르는데요

 

초록 색 옷 단체로 입고

산행 나온 나무들

남의속도 모르고

낄낄거리는 게 아니겠어요

 

정상에 올라

가스 요금 달라며

짓궂게 손 내밀고 서 있는

가까울수록 좋은 내 남자

 

 


 

 

김명림 시인 / 포장마차에서

 

 

심사가 뒤틀려 골목길 포장마차

활활 타는 번개탄 위,

꼼장어 벌겋게 익어 가는 밤

옆자리 사내들 정치, 경제 안주 삼아 조각난 인생을 마시네

인생은 말이지, 결국엔 꼼장어 연기처럼 사라져 갈 뿐이야

포장마차 주인 눈치보며 깜빡깜빡 졸고있던 호롱불

거나하게 취한 사내 말에 고개 끄덕이고

대첵 없이 詩에 매달린

내 머리도 덩달아 끄덕이네

그래,

한낮 연기 같은 生

스스로 옥죄이며 살진 않았는지

함박눈 펑펑 쏟아지는 길

눈 위에 별것도 아닌 인생

꾹꾹 찍으며 돌아오는데

그가 자꾸 따라오며 매달리네

죽자 가자 매달리네

 

 


 

 

김명림 시인 / 상팔자, 그녀와 놀다

 

 

여고생인 친구 딸이 가출하여

답답한 마음에 찾아간 점집

한복을 곱게 입은 처녀 점쟁이가

요령으로 딸랑딸랑 조각보를 꿰맨다

 

한 땀 한 땀 꿰매가던 조각보

한 귀퉁이에서 뚝, 멈춘다

며칠 기다리면

조각보가 완성되니

밥 잘 먹고 기다리란다

친구의 얼굴이 환해진다

 

나도 슬그머니

만 원짜리 빳빳한 지폐 몇 장

불상 앞에 놓는다

대뜸, 연필 집어 던지라 한다

자격증시험공부 중이라고 얼굴에 씌였나?

 

상팔자를 타고 났으니

돈 벌 생각 말고 봉사나 하며 살라한다

 

실컷 낮잠 자고 일어나

상팔자, 그녀와 함께

커다란 양푼에 열무김치 넣고

세상을 썩썩 비벼먹는다

 

 


 

 

김명림 시인 / 유모차

 

 

제비꽃 짹짹 피어나는 산책 길

숲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그녀를 보았네

 

그냥 지나치려다

고향의 어머니가 생각나 일으키려니

온몸이 불덩이였네

급히 119를 불러 병원에 모시고 갔네

 

외롬병이 짙어져

가슴 속 깊이 대못이 박혔다는

굵은 안경테 너머

의사가 전하는 말

비수 되어 가슴 찌르네

 

혼자 사는 갓난할머니 관절염으로

세 끼를 한숨으로 밤 말아 드신다기에

등 기대어 말벗이나 하라며 소개해주었네

 

갓난할머니 튼튼한 다리가 되아

여섯 개의 다리 푸르게, 푸르게

초원을 걸어가네 걸어간다

 

 


 

 

김명림 시인 / 동반자

 

 

이른 아침, 비 오는 거리를 노부부가 걸어갑니다 뒤뚱거리는 걸음 때문에 몸이 우산 밖으로 자주 빠져 나옵니다 우리도 살아오면서 세상 밖으로 나간 일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종갓집 종부로 살아온 아내, 치매 걸려 고생하던 시어머니가 십 년 만에 영감님 곁으로 떠나자 모질게 잡고 있던 긴장의 끈을 놓아 버린 탓일까 그만, 뇌출혈로 쓰러졌습니다. 우산 밖으로만 떠돌던 남편, 속죄인 양 사랑으로 아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진즉 잘하지 늙고 병든 담에 잘하면 무슨 소용 있느냐고 동네 아낙들 수군대지만 야지랑스럽게* 남편 등에 업힌 아내는 마냥 신이 났습니다 지나가던 바람 한 줄기, 남편 땀방울 닦아주며 등 토닥여줍니다.

 

* 얄밉도록 능청맞으면서도 천연스럽다

 

 


 

 

김명림 시인 / 어느 노파의 독백

 

 

마늘 껍질을 벗기며

속껍질을 슬쩍 눈감아 준다

벌거벗은 마늘 몸에도 차마 손톱자국을 남기고 싶지 않아

상처 입는 것이 어디 마늘뿐이겠냐고

자신의 시퍼런 상처를 눈물로 쓱 문지른다

꽉 쥐고 펴지 않으려는 주먹 같은 마늘을 쪼개며

치마끈 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던 열여섯 꽃봉오리

눈보라 속에 파르르 떨고 있는 숫처녀를 본다

첫날 밤, 새 신랑이 풀어주는 부드러운 손길이 아니라면

아, 짐승들의 진흙투성이 군홧발로 짓밟히지는 말았어야 했다

군홧발이 바뀔 때마다 대못이

가슴 속 깊이 박혔다

하나, 둘, 셋, 아흔아홉……

휘어진다, 못인들 제대로 박히겠는가

깐 마늘을 절구통에 찧는다

으깨어지면서 튀어나온 마늘이 손등에 닿는다

아리다

그래, 깨어진 마늘도 제 독한 상처를

세상에 알리고 싶어 하는데

내 몸에서

한恨서린 사리舍利가 나오거든

대한해협 건너 그들에게 보여서

떠도는 영혼 달래준다면

열여섯 꽃봉오리

다시 한 번 활짝 꽃피워보련만

 

 


 

 

김명림 시인 / 스승

 

 

피 몇 방울 보시하고

상추 몇 닢 얻었습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걸

모기한테 배웠습니다

 

 


 

 

김명림 시인 / 글꽃 피어나는 집

 

 

글로 만난 인연도 있지

우리가 만나는 그곳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꽃,

글꽃이 날마다 피고 있지

꽃을 통해 안부를 묻고

일상을 향기로 전하곤 하지

어느 날, 그대가

대문에 못을 쾅, 쾅 박고 사라져 버리면

매일 보리란 글꽃도 시들어 버리고 말지

주인 없는 집에

바람과 함께 담장을 넘고

또 어느 날은 달님 벗 삼아

수북이 쌓인 먼지도 털어내기도 하지

그대의 흔적에 입 맞추고

그대가 남기고 간 쓰디 쓴 커피를 마시며

가끔은 그대를 원망도 하지

안녕이라는 글꽃이라도

한 송이 남겨줄 일이지

그대의 글꽃

언젠간 다시 꽃 피울 날 있겠지

 

 


 

 

김명림 시인 / 꽃멀미

 

 

의료원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남쪽에 사는 친구,

핸드폰으로 전해 오는 봄소식

 

이름도 망측한 큰개불알꽃이

철없이 피어나

보랏빛 얼굴로 히죽히죽 웃고

광대나물도 진분홍 웃음 요염하게 날리니

매화도 덩달아 하얀 웃음 풋, 풋 터져 나오고

계절도 늙었는지 망령이 났다고 넉살을 떤다

 

버스 올 때가 되었는데

시간을 보려고 휴대폰을 찾는다

가방 이곳저곳 뒤지는 통에

울산과 서산의 거리가 길었다, 짧았다 한다

전화 감이 좋지 않다는 친구에게

휴대폰 찾고 있는 중이라 하니

어머머! 너 치매 중증 아니니?

 

철모르고 피어난 꽃 소식에

나도 잠시 꽃멀미를 앓았던 건 아닐까?

 

 


 

김명림 시인

강원도 양구 출생. 2011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시집 『어머니의 실타래』 『내일의 안녕을 오늘에 묻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