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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하 시인 / 저녁의 꽃들
누가 꽃들의 그림자를 묶어 놓았을까 휘어진 꽃대가 어둠에 가려져 있다가 불빛을 향해 힘겹게 고개를 든다 바닥의 물기를 끌어당겨 일어서는 뿌리들 제 무늬를 감싸 안은 잎이 파르르 몸을 떤다 스며드는 것이 살아내기 위한 안간힘일 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곳에서 맑은 생각들이 물들고 있다
비워낸 마음이 바람을 지탱하는 힘이었을까 붉은 속이 다 보이는 꽃잎을 열면 가슴과 가슴이 맞닿은 자리에 별이 뜬다 어떤 마음이 꽃 속에 온기를 불어 넣었나 불빛이 비치면 한 번도 울어보지 않은 것처럼 환하게 얼굴을 내미는 저녁의 꽃들 걸어가는 그들의 그림자가 기우뚱거린다
김예하 시인 / B플랫 단조의 골목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나는 정중해지려고 해
움츠린 내 뜰 안으로 비와 바람을 불러들여 꽃을 뭉개는 일은 없도록 하자
그렇다고 축축한 신발을 끌고 누군가의 한 마디에 불변의 소나타로 남지는 않을 것
지난날들이 들어와 앉은 커피숍 한 잔의 클래식에 리필을 사양한 시간이 가라앉는다
고화를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식어버린 음악에 비워지는 사람들
지금이야 막이 오른 창으로 후드득 달려드는 얼굴 과거는 스타카토, 끊어지는 빗방울 같은 것
B플랫 단조의 골목에서 누군가의 눈동자를 바람의 손에 건넨다
흔적은 끊기고 한 뭉치 구름에 길들여진
아무 일 없는 거야 지나간 노래는 변주되거나 허밍
김예하 시인 / 일력
벽에 걸린 새벽이 낱장입니다 하루를 들었다 놓았다 오늘을 달래주세요
푸른 시간들이 내일 한 장, 마른 잎 두 장... 지우고 있습니다 카운트다운은 사절입니다 나의 시간들을 철봉대에 거꾸로 매달아놓고 뒤편의 변수를 숭배하기로 했어요
내 손바닥 안에서 쥐락펴락한 그것, 캄캄할수록 더 명징한 한 줄기 빛이 아니라서 오늘이 끝점을 향해 점점 얇아집니다
빛도 호흡곤란이 있습니까 저 초록의 부스러기들 나를 비울 때까지, 내일의 운세는 인욕입니다 틈 사이로, 새벽이 나를 한 장 떼거나 넘기는 방식으로
김예하 시인 / 마지막 파문
앞마당을 지켜온 호두나무가 베어졌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무는 호두알 속에 주름을 새기고 있었다
해마다 잘 익힌 가을을 한 말씩 건네주더니 한 마디 말도 없이 톱날이 다녀가고 덩그러니 남은 밑동의 표정이 어리둥절하다
뿌리를 거세당한 몸통 마지막 비명마저 호두알에 감춘 나무의 나이테는 격렬한 파문이다
일렁이는 결을 따라 밤새 흔들리는 나뭇잎 스르르 잠 들던 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겹겹 물길을 놓아 뿌리부터 차오른 옹이를 헤아리다보면 어느 그늘이든 가벼운 건 없다
무늬로 남은 둥근 결은 치열하게 살아온 시간의 기록장
왕성한 시절이 잘려나가고 피 흘린 제 몸에 못이 박힐 때 그는 알고 있었을까
누군가의 마지막 안식이 되리라는 것을
김예하 시인 / 풋마늘
혹한을 견뎌온 발은 온통 흙투성이야
푸른 잎에 새겨진 주홍글씨 그 낙인만 만져도 가슴에 멍이 드는
몸은 날마다 푸른 채로 시들어가지
어둠에 뿌리를 둔 것들은 뜨거운 수액을 원해 한낮에도 피가 마르지
환하게 부서지는 빛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얼룩들
바람으로 씻어봐 수군거리는 저녁이 비늘처럼 반짝이면
서성이는 바깥은 늘 불안해 날마다 부풀려지는 너
무언가를 들킨 것처럼 파란 물이 엎질러진 새벽
멍에를 지고 저만치 누군가가 오고 있어
'풋'이야
변두리로 밀려나, 네가 나를 뱉어냈을 때 명치끝으로 흘러드는 눈물
알고 있니
온전히 속을 비우고 나면 한 묶음의 시련이 완성된다는 걸
김예하 시인 / 파문
앞마당을 지켜온 호두나무가 베어졌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무는 호두알 속에 물결을 새기고 있었다
해마다 잘 익힌 가을을 한 말씩 건네주더니 한마디 말도 없이 톱날이 다녀가고 덩그러니 남은 밑동의 표정이 어리둥절하다
뿌리를 거세당한 몸통 마지막 비명마저 호두알에 감춘 나무의 나이테는 격렬한 파문이다
일렁이는 결을 따라 밤새 흔들리는 나뭇잎 스르르 잠들던 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겹겹 물길을 놓아 뿌리부터 차오른 옹이를 헤아리다 보면 어느 그늘이든 가벼운 건 없다
무늬로 남은 둥근 결은 치열하게 살아온 시간의 기록장
왕성한 시절이 잘려나가고 피 흘린 제 몸에 못이 박힐 때 그는 알고 있었을까
누군가의 마지막 안식이 되리라는 것을
김예하 시인 / 데드타임
비포장도로 위의 바퀴가 비틀거려요
헤드라이트는 캄캄한 길을 열고 그는 졸음을 밀어내기 위해 상향등을 켜죠
이제 막 슬픔을 그친 낙타처럼 울먹이는 눈을 속도가 단련시켜요
아무리 닦아도 흐려지는 시야 그가 달려온 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모래로 흐트러진 그림자들은 한 줌 뼈도 남아있지 않아요
허공을 거머쥔 손에서 도망칠 순 없는 건가요
절박한 순간에
서로의 비명 속으로 뛰어드는 바람
마지막 순간까지 붙잡았던 그것, 어디에 멈춰 있나요
그 어디에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어요
전복된 바퀴에 흘러내리는 별들의 주검들
속도를 빠져나온 불빛이 사방으로 흩어져 허공을 덮을 때
환하게 폭발하는 새벽
깨진 거울 속으로 아주 잠깐 마주친 빛에 몇 개의 살점이 찢겨나가고야 알았죠
그의 평생이 속도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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