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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진 시인 / 귀뚜라미 가시
내 마음에 파란 힘줄 솟네 내 마음에 하얀 뼈도 비치네 눈물 헤프고 웃음도 헤픈 내 마음은 바람이네 흐르는 물과 같은 바람이네 가을이 멀지 않았기에 참고 견딜 수가 있었네 맹위를 떨치던 불볕더위 이제 한풀 꺾이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우네 귀뚜라미 울음에 바늘이 있네 아니, 가시가 분명하네 귀뚜라미 울음 가시에 찔려 피 흘려 본 사람 왜 없겠는가 참 조심하며 살지 않고는 마음의 눈 자칫 멀겠네 귀뚜라미 울음 가시 장미 가시보다 더 아프네
박만진 시인 / 금붕어 한 마리
눈에 띄지 않는 곳애 숨어서도 바느질 실밥은 숨을 죽인다 어느 날 바지 호주머니 속에 삿대질을 깊숙이 찔러 넣은 채로 까맣게 잊은 지가 꽤 오래i다 산, 산, 뻐꾸기는 울고 좋은 시는 써지질 않고 어긋매낀 원고지의 풀빛 칼날에 자칫 손가락 하나 베었다 아휴 피, 피다! 어줍은 상처의 손가락으로 빈 어항 알맞은 물에 조그마한 동그라미를 그리니 마술사의 마술에ㅐ 풀려나듯 금붕어 한 마리 꼬리지느러미 치며 노닐고 있다
박만진 시인 / 흐르는 물거울
가야산은 산기슭에 숨은 듯 감춘 폐사된 보원사지를 허허로이 비우고 좌탈입망坐脫立亡하듯 만산홍엽 떨구며 잘 익은 가을을 떠나보낼 채비와 제 몸에 품고 있던 물까지 꾸륵꾸륵 마저 다 토해내고 있었네 옛 영화 아무 흔적도 없고 시작과 끝, 흥망과 성쇠가 너무도 분명한 절대 풍경에 석물石物만 상처이듯 유적으로 남아 한 물결이 만 물결을 따른다고 강당골 계곡 굽어 흐르며 산 그림자 낮추어 물 위를 건너는 햇살에게 육전六錢 소설 이야기 조調로 말씀 이르고 우뚝 선 암벽에 돋을새김 한 웅숭깊은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께서도 폐사지, 그 향내 나는 상처 흐르는 물거울에 살짝 비추어 백제의 미소 푸르고 맑게 씻으시네
박만진 시인 / 모자의 주인
못도 머리가 있다 아니, 머리가 아니라 대가리다 가끔가다간 메뚜기이듯 방아깨비이듯 폴짝 뛰어 풀숲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오호라! 대가리, 대가리, 곧듣던 대가리들아 몇 번쯤은 망치의 말씀을 거부하라 꼭두새벽 등산을 해 온 내 모자, 방금 산에서 내려온 모자를 벗어 바람벽에 붙이며 생각을 갸울이니 둥근 머리못 대가리가 나보다 내 모자를 훨씬 더 많이 쓰고는 머지않은 날에 모자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꽃무늬 바람벽의 자기라 할 것 같다
박만진 시인 / 오이가 예쁘다
노오란 호박꽃 옆에 노오란 오이꽃 예쁘다 호박꽃이 들으면 서운해 할지 모르겠지만 오이꽃 작아 예쁘고 작은 꽃이 솔직히 귀엽다 매미 사납게 운다 감나무 가지에 깃들어 잠을 자던 바람이 자칫 건드려 울려 놓은 게다 귀가 슬픈 것이 아니라 아픈, 목소리가 큰 사람이 말싸움에서 승기를 잡는, 세상 모든 이치가 그렇고 그런 것이다 감나무의 꽃이 감나무의 웃음이라면 덩굴 풀의 꽃이 덩굴 풀의 웃음이겠다 절대로 울지 않는 울지 못하는 노오란 호박꽃 옆에 노오란 오이꽃 예쁘다 제철에 벌 나비가 찾아오지 않아 호박꽃은 거지반 애호박을 맺지 못하지만 오이꽃은 깜냥대로 애오이를 낳는다 노오란 호박꽃 한 송이 한 송이 황소들의 목에 종으로 달아 주면 좋겠다 노오란 오이꽃 한 송이 한 송이 소녀들의 머리핀 꽃으로 꽂아 주면 좋겠다 애오이 벌써부터 아기 가시가 돋기 시작한다 오이꽃 예쁘니 오이도 예쁘다 소리 듣겠다
박만진 시인 / 촌수
나는 숫자에 어둡다 덧셈 뺄셈에 어둡다 낯가림도 심하지만 곱셈 나눗셈엔 더 캄캄하다 고소공포증이 더 큰 문제다 갚을 셈 받을 셈이 발등의 불일 때에 어느 저물녘 담뱃불이 보다 먼저 갚을 셈을 비벼 끄고자 하는 것이다 결코 손해 보며 삶을 살고 있다는 말 아니다 어쩌다가 모처럼 본향本鄕에 가면 일가친척의 낯내는 무릎끼리 몽긋거리는 촌수 따지는 일에 숫접게도 진땀이 난다 팔촌 십촌 넘어서야 풋낯 하는 사이로 앞질러서 말하자면 그 이상은 잘 모른다 부부 사이를 일컬어 무촌無寸이라고 그 휑한 말뜻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아프게 쏟아버린 적 있다 그 사람과 헤어진 지 만 5년이 지났고 나 홀로 지내다 보니 훤히 알 것 같다 부부로 맺어 함께 살 때도 무촌이고 헤어져 이미 남남이 되어서도 무촌이다
박만진 시인 / 강아지풀
구만 리는 보이지 않고
하늘 미냥 높고 푸르거늘
누군가가 귀지를 파고 나서 ‘귀 청소를 하듯이
바람의 귓속을
솔솔 간질이고 있다
박만진 시인 / 천년의 눈물
저 언덕 위 시푸른 풀이 잠이 오는 풀인가 보아, 되새김질하는 누렁이의 동그랗고 순한 큰 눈이 애써 졸음을 쫓으며 이따금씩 끔벅이고 있네 저토록 덩치가 크다고 왕 노릇이야 하겠는가? 천년의 눈물을 그렁그렁 지니고도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어 하품하듯 토해 내는 울음, 숫제 말이 없는 사람을 소 같은 사람이라 하네 사람의 전생이 소라고 하면 소의 전생이 사람이라고 하면 서로 극진히 아낄 노릇이지 논밭 궂은일을 부리면 안 될 텐데, 사람과 소의 울음 중에서 가장 흡사한 울음이 있다면 엄마는 사람의 울음이고 음매는 소의 울음이지만 음매를 엄마로 알아듣는 것은 결코 말귀가 어둔 내 탓만이 아니네
박만진 시인 / 섬
바위가 바지를 내리고
똥을 누는가 보아!
파도가, 그 엉덩이를
철썩철썩 때리며
밑을 닦아주고 있다
박만진 시인 / 어두운 허공
수진 스님을 만나 뵈려고 도비산 입구 수도사를 찾으니 장독대가 따로 없고 요사채 앞마당에서 늘비한 항아리들이 먼저 반기네
스님이 잠깐잠깐 열어봤을 저 꿀 먹은 벙어리들을 보아!
크고 작은 항아리들의 저마다 배부른 모양이 맑고 밝은 하늘을 가득 품어 안은 때문이겠네
마침맞게 달마 대사가 드렁드렁 코를 골며 깊이 잠든 것이 아닌가 싶은 항아리 하나 비켜 있어
초저녁 보름달 같은 뚜껑을 살그머니 열어보니 달마는 안 계시고 항아리 속이 어두운 허공이네
박만진 시인 / 거짓말의 원조
누구 혹시 말 탄 거지를 보았는가? 거짓말의 원조는 거지라네 거지가 말을 탄다, 라는 말이 내 장담하건데 거짓말의 원조라네 정말 그렇지 않고서야 거짓말을 거짓말이라고 했겠는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고 거짓말도 다 까닭이 있을 것이네 거지는 항상 배가 고프다네 먹으면 싸고 먹으면 싸고 먹고 먹어도 금방 배가 고프다네 거지 뱃속에 항상 거지 들었다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거지라네 거지 옷은 오로지 누더기라네 때에 절고 너절한 옷을 입고 사는 거지 거지 상거지가 어느 옷가게 쇼윈도 앞을 서성거리네 어깨 너머 글 겨우 깨우쳤으므로 바르르 떠는 손가락이 50% 세일을 짚어 내네 거지는 어차피 빈털터리라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거지라네 세일 100% 하는 옷가게를 찾아 정처 없이 떠날 수밖에 없다고 하네 거지발싸개 같은 요지경 속 세상에 반값은 있고 왜 공짜가 없느냐고 투덜거리네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거짓말이 아니라는 거짓말에 잘 속는다네 베풀 줄 아는 이치를 깨우치게 하니 오히려 고맙게 여겨야만 한다고 잔디밭 축구공 같은 자부심을 갖고 있다네 당신께서도 잘 나가시던 창창한 한때가 있었노라 흰소리 치네 살다 보면 귀동냥도 좋은 동냥이라네 거짓 말발굽의 편자를 갈아 끼우곤 언젠가는 거짓말의 갈기와 꼬리에 빨, 주, 노, 초, 파, 남, 보, 고무풍선을 매달고 빵빵 터뜨리기도 하면서 말馬의 천국인 제주도에 갈 작정이라네 당신의 몽고반점 원조를 찾아 칭기즈칸의 나라 몽골에 갈 생각이라네
혹시 누구 말 탄 거지를 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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