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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현미 시인 / 울음소리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9.

강현미 시인 / 울음소리

 

 

아파트 쓰레기장 구석, 새끼 고양이가 운다

가까이 가면 도망가고 멀어지면 울고

어미는 새끼를 잊었는지 목이 쉬도록 운다

 

고단한 서울살이에 일을 마치면 죽은 듯 잠이 들고

오랫동안 꿈도 꾸지 않았는데

그날 밤, 고양이 울음이 내 꿈속으로 따라왔다

비린내가 묻어있는 고양이 소리는

차츰 바람 같은 울음으로 바뀌어 가고

잠의 틈 사이로 희미하게 옛집이 보였다

아이들이 웃고 떠들고 뛰어다니고

등을 내준 마루는 반짝 윤이 나고 있었다

 

새끼를 잊은 어미 고양이처럼 고향을 잊고 있었다

이곳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기 전에는 찾지 않으리라

등 돌린 고향

 

십 오년 만에 고향 집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낡은 마루가 먼저 마중 나왔다

윤기 하나 없는 마루는

삭은 틈새로 바람이 드나들며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강현미 시인 / 햄릿 증후군

 

 

회전 벨트를 따라 초밥 접시가 빙글빙글 돈다

서서히 그녀 앞으로 오는 장어, 문어, 새우, 광어 초밥

무얼 먹을까 고민하고

조언을 구하는 사이 접시는 스쳐 간다

한 바퀴를 돌아오니 벌써 다른 사람이 집어갔다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별것도 아닌,

생선 한 점, 밥알 250개 앞에서 망설인다

선택 과잉의 시대, 무엇을 택할지 늘 고민이다

밥을 먹을 때도 메뉴는 아무거나

친구를 만날 때 무슨 옷을 입을까 고민이고

어떤 신발을 살지 주저한다

가장 큰 고민은 그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하는가이다

선택은 늘 갈림길

결정하면 후회가 되고

가지 않는 곳은 미련이 남는다

 

햄릿 증후군,

결정장애인 그녀는 오늘도 세상 앞에서 망설인다?

 

 


 

 

강현미 시인 / 도라지꽃

 

 

할매 할매, 엄마 언제 와

엄마 언제 오냐구

네 어멈 도라지 꽃 피어야 온다

그 말에 매일 도라지밭을 지키는 계집아이

꽃은 피지 않고 콧잔등에 주근깨만 핀다

장롱 속엔 아빠가 사 온 카스테라를 숨겨놓고

활짝 핀 도라지 꽃같이 예뻤다던 엄마

도라지밭 매고 도라지 캐다

도라지가 지겨워 집을 나갔다

하얀 도라지 같은 나를 남겨 놓고

할매는 가끔 엄마를 뻐꾸기 같은 년이라고 욕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아니라고

엄마는 도라지 꽃이라고 울먹였다

풍선같이 부푼 도라지 꽃망울처럼

엄마에게 날아가고 싶은 계집아이

밥 먹어라 한마디에 땅으로 떨어진다

서랍 속 곰팡이 핀 카스테라를 눈치 챈

할매는 매섭게 내 등짝을 후려쳤다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 뛰어온 도라지밭

어른거리는 사이로 보랏빛 꽃이 활짝 피었다

 

 


 

 

강현미 시인 / 고인돌

 

 

교활한 제사장은 속삭였다

하늘로 올라가 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양처럼 순한 처녀가 겁먹은 눈망울로 제단 위에 눕자

청동 칼날이 햇빛에 희뜩 했다

순간, 붉은 피가 단 위를 적시고

구릉을 따라 흘러내리자 사람들은 환호했다

이제 부족은 천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 거라고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강 건너 제단을 만들 때도

돌을 끌어 올리다 한 사람이 깔렸다

어차피 으스러진 한 쪽 다리

신에게 바치자

다리를 잃은 사람은 한동안 환상통에 시달렸고

두 다리가 있는 줄 알고 일어나다 쓰러지고

일어나다 쓰러졌다

다리가 주인을 불렀을까

천신이 불렀을까

그는 제단 밑에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부족의 안녕과 바꾼 처녀

부족의 안녕과 바꾼 다리

그토록 지키려 했던 부족은 흙이 되어 사라지고

고인돌만 남았다

 

 


 

 

강현미 시인 / 모래시계

 

 

모래는 시간과 함께 흘러내린다

똑 똑 똑 일정한 속도로

천천히 좁은 통로를 지나 가라앉는다

이 공간은 소리조차 나지 않고

그동안 한 번도 경로를 벗어난 적이 없다

딱 정해진 만큼만 쌓인다

무언가를 위해

때로는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면서 시간은 쌓이고 쌓인다

더 여유가 없으면 돌려서 시작하면 된다

어지럼증도 없이 금방 적응하는 모래시계

끝은 처음이다

 

내가 쌓다가 포기한 것들

꿈, 사랑, 열정

그것들도 뒤집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반전을 기대할 수 있을까

투명한 유리 속의 시간

처음은 늘 새롭다

 

 


 

강현미 시인

서울출생, 계간《시현실 》2017년 봄호 신인상 수상하며 등단. 동안문학회 회원. 시산맥 특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