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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재연 시인 / 내가 아주 어린 떡갈나무였을 때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0.

이재연 시인 / 내가 아주 어린 떡갈나무였을 때

 

 

내 앞에

조금 앞서서 걷고 있는 저 사람이 사라질 때쯤

사람의 집은 어두워지고

바람은 더욱 차가워지겠다

 

땅에 떨어진 마른 잎들이 한없이 가볍게 바닥을 굴러간다

 

누가 이곳에 숲을 만들었을까

이 숲에 누가 아이를 낳아 사람의 도시를 세웠을까

 

오래 살던 사람들 사라지고

높은 곳에서 흘러 내려온 언덕도 사라지고

떡갈나무만 살아있다

 

떡갈나무의 내력은 어디에도 없다

힘겹게 겨울비가 내린다

 

밤 깊어, 그처럼 차가운 정자마루에 사람이 누워있다

한 사람 곁에 한 사람이 더해져 있는 형상

 

검은 외투를 벗어 뒤집어쓰고 있다

온 몸을 미처 다 덮지 못한 외투 속에서 삐져나와 있는

작고 고운 맨발

 

어린 맨발

 

가로등 불빛이

비에 다 젖는다

 

누가 이곳에 사람을 낳아

사람의 도시가 되었을까 떡갈나무는 그 내력을 알아

추운 겨울 저녁에도 집으로 돌아갈 줄 모른다

 

어두워질수록 점점 밝아져 가는 나무들

 

누가 사람의 팔을 베고

나무의 잠을 자려 하는가

 

계간『시산맥』 2021년 봄호 발표

 

 


 

이재연 시인

전남 장흥에서 출생. 2005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2012년 제1회 오장환 신인문학상 당선. 시집으로 『쓸쓸함이 아직도 신비로웠다』(실천문학사, 2017)가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