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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분필 시인 / 눈 깜짝할 사이에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2.

박분필 시인 / 눈 깜짝할 사이에

 

 

내가 언제부터 모퉁이에다 엄마 닮은 소를 묶어 두었는지

언뜻 십 년이 넘었다

그동안 한 번도 배고픈 소를 위해 풀 한줌 베다 준 기억이 없다

 

나는 왜 마른 지푸라기 한 줄기도 없는 내 안에다 소를 묶어두었을까

소는 내내 어떻게 견뎌냈을까

내 마른 땅에서는 마고성처럼 지유가 솟아나는 것도 아닌데

 

오래도록 풀을 먹지 못해 되새김조차 못한 소,

축 처진 두 귀로는 하늘의 소리를 듣는 듯도 보였다

 

그래, 우리 둘이 함께 걷자

나란히 걷는 동안 소와 나는 모녀처럼 행복했다

 

안개의 늪을 벗어나자 눈 깜짝할 사이에 밝고 청정한 푸른 숲이 나왔다

마고대성의 낙원일지도 모를……

 

그곳에다 나는 내 말뚝에 묶여있던 엄마의 끈을 풀어

새처럼 훨훨 날려 보냈다

 

날고 있는 건 내 날개였다

 

 


 

 

박분필 시인 / 이슬 방주

 

 

어제는 치커리 꽃에 보랏빛을 칠하던 하늘이

오늘 아침에는 보랏빛 꽃에 이슬을 매달고 있네

 

이슬 속으로 아미쉬마을 농부가 마차를 끌고 들어가네

옥수수 밭과 소떼, 감빛 구름도 이슬 방주로 들어가네

 

옥수수밭 사이 끝없는 길을 걷다가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네

자칫 맑은 것들만 태운 이슬방주가 산산조각이 날지도 몰라

 

낮은 풀잎에 맺혀있는 영롱하게 빛나는 마음을 보네

아미쉬 사람들은 욕심 없어 맑고 투명한 이슬이었네

 

 


 

 

박분필 시인 / 개기일식

 

 

어둠이 불타는 태양을 조금씩 갉아먹는다

누에한테 갉아 먹히는 뽕잎처럼 차츰차츰 빛이 먹혀지고

황금빛으로 빛나던 세상이 점점 진청색으로 물들어간다

 

혼돈의 시대가 다시 도래할 것 같은 공포로

나는 한여름 바다로 명상을 하러 온 사람처럼

데일 것 같은 뜨거운 모래에 두 무릎을 꿇는다

 

싸늘한 바람이 맨살을 파고든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에도 어둠의 장막이 무겁게 내려진다

마치 봄에 나뭇잎이 떨어질 때처럼 내 입술도 파랗게 떨린다

 

이윽고 지구는 99퍼센트의 태양을 먹혀버렸다

겨우 남은 머리카락만 한 빛 한 올이 어둠과 맞섰다

 

1퍼센트의 빛과 99퍼센트 어둠의 대결

 

그때 어둠속에 얼핏 그분의 형상이 보였다

어둠, 그 어둠을 이기는 오직 한 분, 그리고

 

사라졌던 빛 한 올 한 올이 되돌아왔다

한 폭의 정교한 천지창조를 본 순간이다

 

내 입술은 그 광경에 취해 다시 뛰고 뜨거워졌다

나는 차가운 눈 속에 핀 꽃처럼 으스스한 기분으로

빛이 쏟아지는 바다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99년 만에 온 일식이었고 버지니아비치 최석핀베이였다

 

 


 

 

박분필 시인 / 북촌

 

 

어둠이 두 눈을 감아라한다

네 마음 하나 짚고 믿어라 그리고 따르라한다

 

어둠이 ‘나’란 바코드를 인식하자

개울물 소리, 산새소리가 내 흔들림을 잡아준다

 

나는 완전한 어둠의 한 부분이 되어

날개를 펴고, 내 앞을 가로막은 벽을 더듬어, 열리지 않던 너의

문을 지나고 세상만큼 위태로운 난간을 짚으며 나아갈 때

 

그제야 내 안으로 쏴아 물굽이가 머리를 돌리는 소리

구질구질한 세상사의 찌꺼기로 막힌 개울을 트고 흐른다

 

행복하다, 저 물소리

이때까지 들어본 어떤 소리보다 아름답다, 이 새소리

 

어둠의 함성은 고요다

 

 


 

박분필 시인

경북 울산 울주군 출생. 성균관 대학교 대학원 유교경전학과 석사과정 수료. 1996년 『시와시학』으로 문단활동을 시작. 시집 『창포잎에 바람이 흔들릴 때』『산고양이를 보다』『산고양이를 보다』『물수제비』 『바다의 골목』 등이 있고 동화집 『하얀 전설의 날개』 『홍수와 땟쥐』를 펴냄. 제4회 문학청춘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