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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규원 시인 / 물과 높이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2.

오규원 시인 / 물과 높이

 

 

밤새 눈이 온뒤 어제는 지워지고 쌓인 희눈만 남은 날입니다

쌓안 눈을 위에 얹고 물물이 허공의 깊이로

물물의 높이고 바꾸고

나뭇가지에서는 쌓인 눈이 눈으로 아직까지 그곳에 있는 날입니다

 

뒤뜰에 붙은 언덕의 덤불 밑에서 오목눈이와 멧새와 지빠귀와

그리고 콩새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먹이를 찾고

새들이 먹이를 삼킬 때마다

덤불 밖의 하늘이 꼬리 쪽으로 자주 기우는 날입니다

 

직박구리 한쌍이 마른 칡덩굴이 감고 있는 산수유에 앉아

노란 꽃이 진 자리에 생긴 붉은 열매를 챙기로

열매가 사라진 자리에는 허공이 다시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 날입니다

그러나 콩새 한 마리가 급히 솟구치더니

 

하늘에 엉기고 있는 덩굴을 빠져나와 동쪽으로 가서는

몸을 그곳의 하늘에다 깨끗이 지우는 날입니다

 

 


 

 

오규원 시인 / 빗방울

 

 

빗방울이 개나리 울타리에 솝-솝-솝-솝 떨어진다

 

빗방울이 어린 모과나무 가지에 롭-롭-롭-롭 떨어진다

 

빗방울이 무성한 수국 잎에 톱-톱-톱-톱 떨어진다

 

빗방울이 잔디밭에 홉-홉-홉-홉 떨어진다

 

빗방울이 현관 앞 강아지 머리에 돕-돕-돕-돕 떨어진다

 

오규원, 『두두』, 문학과지성사, 2008, 47쪽

 

 


 

 

오규원 시인 / 탁탁 혹은 톡톡

-물론 그도나도 법 속에 있다

 

 

내가 무심코 아니 유심코 손가락으로

책상을 탁탁 혹은 톡톡 두들긴 그 소리는

봄에 닿거나 여름에 닿거나 가을

겨울에 닿는다 순간 이 지구에서

수백년 동안 일어난 일이 없는

진동의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나비가 난다 아니 비가 오고

자작나무와 느티나무 잎이 썩는다

 

내가 무심코 아니 유심코 손가락으로

책상을 탁탁 혹은 톡톡 두들긴 그 소리는

순간 탁탁 혹은 톡톡의 우주가 된다

그 우주는 창 안에 창 밖에 있다

그 우주가 수성인지 금성인지

또는 목성인지 천왕성인지 이 지구 위에

어쩌다 떨어지는 탁탁 혹은 톡톡의 운석을 받아보아야 안다

 

내가 무심코 아니 유심코 손가락으로

책상을 탁탁 혹는 톡톡 두들긴 그 소리는

중국의 서안이나 미국의 텍사스나

인도의 갠지스 강에서도 순간

탁탁 혹은 톡톡 울린다 그래서

서안에서는 궁궐의 한쪽 문이 열리고

텍사스에서는 주유소가 새로 생기고

갠지스 강에서는 시체 하나가 떠내려간다

 

오규원의 <한 잎의 여자>

 

 


 

 

오규원 시인 / 새와 날개

 

 

가지에 걸려 있는 자기 그림자

주섬주섬 걷어내 몸에 붙이고

새 한 마리 날아가네

날개 없는 그림자 땅에 끌리네

 

 


 

 

오규원 시인 / 오후

 

 

아침에는 비가 왔었다

마른번개가 몇 번 치고

아이가 하나 가고

그리고

사방에서 오후가 왔었다

돌풍이 한 번 불고

다시 한 번 불고

아이가 간 그 길로

젖은 옷을 입고 여자가 갔다

 

 


 

 

오규원 시인 / 커피나 한잔

 

 

커피나 한잔, 우리들께서도 커피나 한잔,

 

우리들의 함묵(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아니함),

우리들의 거부께서도 다정하게 한잔,

우리들을 응시하고 있는 창께서도,

창밖에서 날개를 비틀고 있는 새께서도 한잔.

 

이 50원의 꿈이 쉬어가는 곳은 50원어치의 포도 덩굴로 퍼져 50원어치의 하늘을 향해 50원어치만 웃는 것이 기교주의라고 우리들은 누구에게 말해야 하나.

 

용납하소서 기교주의여, 기교주의의 시간이여 커피나 한잔.

 

살의 사실과 살의 꿈을 지나 살의 노래 속에 내리는 확인의 뿌리께서도 한잔 드셨는지.

 

저 바람의 비난과 길이 기르는 불편한 발자국과 그 길 위에 쌓이는 음울한 사자(死者)의 목소리를 지나 우리들께서는 무엇을 확인하시려는가, 우리들께서는 그 패배로 무엇을 말하시려 하는가.

 

풀잎은 이유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풀잎은 풀 때문에 흔들린다고 잠 못 드신 들판께서도 피곤하실 테니 커피나 한잔.

 

 


 

 

오규원 시인 / 만물은 흔들리면서

 

 

만물은 흔들리면서 흔들리는 만큼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있는 잎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만물의 잎은 제각기

잎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을 슬픔 들판의 고독 들판의 고통

그리고 들판의 말똥도

다른 곳에서

각각 자기와 만나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들로 가서 비로소 깨닫는 그것

우리도 늘 흔들리고 있음을

 

 


 

오규원(吳圭原, 1941~2007) 시인

1941년 경남 삼랑진에서 출생. 본명은 규옥(圭沃)이고, 부산사범학교를 거쳐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 1965년 《현대문학》에 〈겨울 나그네〉가 초회 추천되고, 1968년 「몇 개의 현상」이 추천 완료되어  등단. 시집으로『분명한 사건』, 『순례』,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 『사랑의 감옥』 『길, 골목,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오규원 시 전집』 1 ·2 등과 시선집 『한 잎의 여자』 그리고  유고시집 『두두』가 있음. 그밖의 저서로는 시론집 『현실과 극기』,  『언어와 삶』 등과 『현대시작법』이 있음.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한민국예술상 등을 수상.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역임. 2007년 65세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