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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애정 시인 / 구피 닮은 여자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1.

안애정 시인 / 구피 닮은 여자

 

 

어항이 생겨 구피를 사러 갔다

 

레인보우 선셋 미가리프가 숨어 있는

포트 수초 사이로

창 밖에서 들어온 햇빛이 머문다

 

수족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작은 구피

파란물이 일렁인다

 

물이 내 발목을 적시고

배가 뒤집힌 물고기들이 파닥인다

 

맑은 종소리 들리고

젖은 발이 걸어 들어와 멈춘다

 

수족관 물이 흘러 닿은 강가에

빨간 꼬리 구피 닮은 여자와 내가 서 있다

 

여자의 눈길이 강물을 따라 천천히 옮겨간다

한바다를 만나기 위해

 

 


 

 

안애정 시인 / 겨울 내장산에서

 

 

눈꽃 왜바람 타고 산으로 올라가니

낡은 오색들이 소리를 낸다

 

부처님 오신 날

등불을 밝혔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억지로 등 돌려세웠던

너의 어깨가 흔들리는데

지금에서야 나는 난타*가 되려 한다

 

한 번 스쳐 간 인연이 다시 닿으려면

몇 번의 겁 (劫)을 쌓아야 할까

 

* 난타: 부처님 생전에 가난한 여인 난타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아 불을 밝혔다. 아침이 되자 다른 연들은 모두 꺼졌지만 난타의 등은 꺼지지 않았다

 

 


 

 

안애정 시인 / 성삼재에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안개에 싸여 말 잃은 산

그리고 잿빛 하늘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하얀 안개를 맞으며 서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은

지리산이라 하였다

가장 높은 길을 따라

내가 멈춘 곳은

성삼재라 하였다

여름 햇살이 보이지 않아 찾았더니

산자락 아래 남원 정류장에

숨어 있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나는 지리산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안개에 싸여 말을 잃은

성삼재에서

 

- 『구피 닮은 여자』(시산맥, 2018)

 

 


 

 

안애정 시인 / 선운사 연가

 

 

그녀를 품고 싶은 마음

송악 줄기에 붙이고

애기 단풍 담은 도솔천 따라갔네

 

남들은 동백꽃 보러 온다지만

꽃보러 온 게 아니니

그 꽃 졌다고 서운해 할 것도 없지

 

해넘이에 바위굴 앞을 지나는데

우리 사랑할까

그녀 말에 가슴으로 들어온

낙조대의 꽃노을

 

육백년의 시간이 뿌리내린

장사목 우듬지 되어

선운사 골짜기를 내려갔네

 

 


 

안애정 시인

전남 영광에서 출생. 방송대 국어국문학과와 한국교통대학교 인문대학원(석사) 졸업. 1989년 제5회 MBC청소년문학상 시,시조부문 시 당선으로 작품 활동 시작. 2018년 충북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시집으로  『구피 닮은 여자』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