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한춘화 시인 / 봄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7.

한춘화 시인 / 봄

 

 

봄이 온다고 별일 있겠습니까

밥 그런대로 먹으면 되고

빚도 늘면 늘지 줄지 않겠고

꽃 피기 시작한다고 소문 돌면

저승꽃 화창하게 만발할 테고

진작 귀먹고 그리운 사람은 불러도

딴전 부릴 테고

다아 지금처럼도 괜찮습니다

 

다만, 길거리에서 오줌 마려울 때

항상 굳게 잠긴

정류장 앞 건물 화장실만이라도 열려

시원하게 일 볼 수 있는

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한춘화 시인 / 골목

 

 

타살이다

그러나 울지 않았다

 

내가 아는 늙은 골목은

쪽잎만 한 집을 거느리고 구불구불 기어갔다

술이 취한 아버지들은 골목 탓을 하며

비틀비틀 살았다

달이 엉덩짝 까고 집들을 궁둥이로 문지를 때만

골목은 잠시 눈을 붙였다

연탄재가 뒹굴던 막다른 골목에는

작은 바람소리에도 헐거워지는 미친 춘자가 살았다

춘자 몸 이슥한 골목에

사내들이 함부로 내갈긴 아이들도

골목이 업어 키웠다

토사물과 지린내는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골목의 출구는 매우 좁아서 개미들만 나갈 수 있었다

개 밥그릇에 드나드는 참새들과

천장을 달리던 쥐들은 나름대로 평화로웠고

깨진 외등아래 자유롭게 흘레붙던 개들도

골목을 벗어나지 않는 음성으로만 짖으면

골목이 잡아먹지 않았다

골목이 어느 날 살해당했다

골목에 붙었던 집들도

골목에 나앉아있던 고운 분꽃도 함께 죽었다

나는 그 골목 빠져나왔지만

골목이 마지막까지도 내 신발짝을 움켜쥐고

있더란 소식을 들었다

이제 몇 개 남지 않은 늙은 골목들은

죽음을 피해 높은 곳으로 부지런히 기어가고 있다

 

어디부터 찍을 것인가

허공에 손 올린 포크레인

천천히 돌아가고 있다

 

 


 

 

한춘화 시인 / 쑥국

 

 

봄날 햇살이 톡톡 치고 지나갈 때마다 땅을 뚫고

쑥이 여기 쑥 저기 쑥 나오는지라 손톱 끝으로 똑똑 따

콩가루 무쳐 된장 풀고 팔팔 끓이면 맛난 쑥국 되는 거

다 아시는 일이지라

그 정도 가꼬 침 삼키지 말어라 침 삼킬 일은 따로 있어라

육순 지난 과부골 순천댁 쑥 따다 말고 퍼질러 앉아

궁뎅이 까고 오줌 깔기는데 수상한 바람이 살랑 살랑, 옴마

지나가던 춘정 동한 사내가 그만 덮치고 말았어라

음마, 음마 쑥을 꽉 꽉 쥐는 바람에 쑥 냄새가 진동했지라

날아가던 새 한 마리 과부골 들어가

쑥국 쑥국

그 쳐 쥐길 얼굴은 봤다냐?

아녀 아녀 못 봤댜

암만, 나부터도 똑바로 못 보지라

 

다음 날 새벽부터 과부골 여자들 들판에서 쑥국 쑥더꿍 쑥국

순천댁 동갑내기 허리 아픈 속초댁만 집에 누워

나도 쑥국 먹고 싶어야, 쑥국 먹고 싶어야

 

「서시」2008 여름호 발표

 

 


 

한춘화 시인

2007년 《시선》신인상으로 등단. 제8회 홍완기 문학상 수상. 현재 도예가〈마음의 행간〉동인, 〈시산맥〉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