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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희순 시인 / 수혈놀이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7.

황희순 시인 / 수혈놀이

 

 

처음부터 우리 사이엔 날선 칼이 놓여있었지 서로를 넘나드는 발자국에 피가 묻어났지 나란히 누워 마주보면 이빨 사이로도 피가 스몄지 그 피 서로 핥아주며 낄낄거렸지 손만 잡아도 상처가 환히 피었지 너의 외로움과 나의 즐거움이 부딪치면 불똥이 튀었지 둘이 머문 들판은 언제나 축제장이었지 불꽃 낭자한 축제에 정신이 팔려 피를 몽땅 낭비해 버렸지 우린 껍질만 남아 밀려다니다 사라졌지 살고 살고 또 살아도 어김없이 혼자라도 다시 살고 싶어지는 12월, 오래 숨겨두었던 마지막 남은 피를 꺼냈지 새싹이 봄에만 돋는 건 아니지

 

 


 

 

황희순 시인 / 나머지 사람들

 

 

까마득한 옛날, 7일 동안 일어난 일이야. 그땐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어. 신은 홀로 모든 걸 창조하셨지. 그리고 또 하나, 사랑스런 너를 내게 보내셨지.

 

쉿, 입을 막았을 뿐인데……. 네가 왜 움직이지 않는지 나중에 알았어. 내 자식을 내가 죽인 거야. 총을 들었지. 내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어. 그뿐이야. 한참 뒤 네 목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어. 아무 일 없다는 듯 놀고 있었어. 죽었으면서 넌 안 죽은 거야. 절대 포기하지 말고 강해지라고, 좋은 엄마가 되어보라고, 신이 기회를 주시는구나 믿었지.

 

모든 게 어렴풋이 보여. 견디기 힘들 땐 냉정해져야 해. 커튼을 닫아야 환해지는 낯선 방, 빛은 위험해. 이건 꿈이 아니야. 저승이 정말 있을까. 있다 해도 가면 안 돼. 여기가 이승이자 저승.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사는 곳. 그래야 해. 그래야 해.

 

 


 

 

황희순 시인 / 사족지몽(蛇足之夢)

 

 

뱀딸기도 처음엔 달콤했대 이쁘기까지 한 그것이 잘난 체를 넘치게 해서 神이 단맛만 빼앗고 뱀 곁에 뱀처럼 기어 다니게 만들어놓았다는 거야

 

뱀이 침 발라 놓았다는 그걸 할머니 몰래 따먹었다고 했잖아 맛을 잃은 뱀딸기가 복수한 거야 저를 탐한 어린 내게 덤터기를 씌운 거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람 시늉을 이토록 오래 할 수 있겠어 이십 년 전에도 말했지 사람으로 둔갑한 나를 아무도 눈치 못 챘다고

 

모퉁이 들어서야 빛나는 이 비늘, 밤이면

세상을 날면들면, 훨훨 춤추는 긴 목

아직도 모르겠어?

 

내 눈, 똑바로 보라니까

 

 


 

 

황희순 시인 / 초파리의 거울

 

 

초파리는 제 피가 붉다는 걸

알고 있을까

벽에 붙은 그를 친 손바닥에

쉼표만한 피가 한 점 묻어났다

심장이 있었던 거니

붉은 네 심장을 내가 터트린 거니

죽은 듯 고요한 나날

벼랑의 현기 견디는 너를

밀어버린 거니

이 고요 어떻게 뼈져나갈까

궁리하는 너를 지워버린 거니

맘 놓고 앉아있을 곳은 없단다

두리번대다 지워진 목숨이

어찌 너뿐이겠니

한밤을 지키는 별은 모두

이 땅에서 지워진 눈빛

너도 별이 되겠구나

내가 별이 될 때까지 나를

지켜보겠구나

 

 


 

 

황희순 시인 / 인생이 아름다워?

 

 

한때는 숨기 좋은 곳이 있었지. 따듯하지 않아도 위태롭지는 않았어. 그날 이후 가지가 하나씩 툭툭 부러지고 하늘이 훤히 보이기 시작하더군. 그게 하늘이 땅이 무너질 징조였다는 걸 삼십 년이 지나서야 알아차렸어.

 

그 후 숨을 곳을 찾아 헤매는 동안 키가 자라, 어딜 가나 꼬리도 점점 비어지게 자라, 그늘조차 없는 허허벌판에 홀로 서있게 되었지.

 

유독 한 나무에만 모여 지저귀는 참새들 본 적 있니? 숨기 좋은 나무의 비밀을 사람이 어찌 알겠어. 어여쁜 조슈아, 이젠 네가 술래 할 차례야. 영영 숨은 네 아비는 나중에 찾기로 해.

 

비어져 나온 이 꼬리부터 싹둑 잘라 묻고, 숨어볼까? 흐흐 그래그래, 인생은 아름답다고 했지. 찾으라고 말할 때까지 눈뜨기 없기. 몸 숨길 만큼 땅 파낼 때까지 찾기 없기.

 

흡, 숨소리도 내면 안 돼. 더 꼭꼭 숨어야 해. 누가 뭐래도 살아남아야 하니까.

 

 


 

황희순 시인

1956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났으며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강가에 서고픈 날』(1993), 『나를 가둔 그리움』(1996), 『새가 날아간 자리』(2006), 『미끼』(2013), 『수혈놀이』(2018) 가 있으며, 시집『미끼』로 충남시인협회 작품상을 수상(2014)했다. 현재 <대전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