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숙 시인 / 곰팡이
우기의 끝, 곰팡이가 피기 시작했다 습기들이 좀 더 낮은 곳으로 숨어들기 시작하고 무겁게 젖었던 달력 속 날짜들 한 번의 휴일만으로도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집 안 구서구석 타일과 벽지 주방의 틈새가지 어느 한 곳도 쉽사리 내버려두지 않는다 서둘러 연고약이 필요한 몸의 모서리나 관절들을 살피다가 며칠간의 몸속을 지배했던 붉은 생각들을 건져올린다 푸른 상처들의 시간 문지방들은 독성의 버섯처럼 웃자라고 공과금이 체납된 뉴스에 푸른 얼룩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곧게만 성장하던 해바라기의 어느 쯤이 태양을 찾아낸 듯 구부러지기 시작하고 곰팡이들, 생각의 곳곳을 점거한 채 푸른 저녁을 발효시키기 시작한다 서둘러 단속을 벗어난 기억과 후회의 날들 당분간은 제 여닫힘의 길을 놓쳐버린 문들과 불안들을 그대로 둔 채 외출해야 한다
곰팡이가 스며들었다 칠월을 흔들다 지친 구름 땡볕을 밀어오고 갉아 먹힌 생각에 푸른 상처를 저며넣기 시작한다.
한인숙 시인 / 사과
빛도 낡으면 순해진다
지난가을 햇살 몇 알 설익음에 뒤적이던, 이제야 단내를 말리기 시작한다 쪼그라들면서 쥐어짜는 바구니 안 단물 풋내 나던 지상의 한때를 흥건히 적시는 중이다 성장을 반납하고 상자 속으로 뛰어든 날부터 사과의 생각은 오직 붉음을 향해 매달렸을 것이다 볕이 들지 않는 구석진 창고 안 벌레조차 비켜선 비릿함을 끌어안고 풋설음의 흔적을 시간의 단물로 바꾸면서 궁핍한 날을 보냈을, 지상의 날짜를 잘못 짚었던 게 아니었다 태양의 길을 착각했던 것도 아니다 서둘러 가을을 떨군 마을의 일정 때문이다 어떤 열매가 제 나무를 겨울 저쪽으로 성급히 던지고서 고행의 단물만 꿈꾸겠는가 나는 가끔 윌리엄 텔*의 사과를 명중시킨 그 햇살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가지를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했을 꼭지의 미련이 퍼렇다
껍질을 벗기면 고스란히 드러날 것 같은 태양의 지도가 시큼, 낡은 미각을 끌어낸다
* 윌리엄 텔: 아들의 머리 위에 올려놓은 사과를 화살로 명중시켰다는 것을 오페라의 서곡으로 함.
한인숙 시인 / 꼭지의 힘
줄기 하나에 다섯 개 꽃이 피었다 한 줄로 쭉 핀 호박꽃 말벌이 몇 번 드나들더니 탁구공만한 열매가 맺혔다 야구공만하다 며칠 사이 다시 축구공만하다 불안이 몰아칠 때마다 허공에 고삐를 묶듯 단단히 옥죄는 힘 두어 개 솎아낼까 하다 꼭지의 힘을 믿기로 했다 햇살을 끌어 모으는지 검푸른 빛이 짙다 어머니가 보인다 줄기 하나 허공에 얹어 다섯 덩이를 키우는 호박이나 팔 남매를 이 년 터울로 내리 낳은 어머니나, 태풍이 두어 차례 지나쳤다 큰 놈 틈에 낀 놈이 찌그러지긴 했어도 끄떡없이 지켜냈다 하루가 다르게 좁아드는 허공 식물의 생식기가 꽃이라 했던가 온 힘을 다 쏟는지 더는 꽃을 피우지도 벌을 불러들이지도 않는다 중년에 혼자된 어머니가 홀로 늙는 것처럼 볼우물 깊은 곳의 수선되지 않는 그리움을 뒤적이는 것처럼, 다섯 덩이가 허공을 붉게 밝힌다 저것들 이미 호박이 아니다 모성이다 꼭지의 힘이다 뽀얗게 피는 분진에서 어머니의 젖내가 난다 붉게 패인 골 속 어머니의 세월을 본다
- 한인숙 시집 <자작나무에게 묻는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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