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지희 시인 / 가을, 낯선 도시를 헹구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7.

[2014 영주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김지희 시인 / 가을, 낯선 도시를 헹구다

 

 

한잔 노동이 넘실대는 부엌에는

여자의 일생이 부조되어 있다

 

엄마 허벅지 베개 삼아 달게 잠들었던 소녀시절이

캄캄해 보이지 않는 새벽 어스름

잠든 아이의 꿈자리를 지나

슬그머니 부엌에 나가 불을 켠다

문득 완전한 어둠 속에 던져졌던 세상 한 곳이 환하다

옹이 박힌 가슴으로 숭숭 새는 물소리를 잠근다

부엌 속에 갇혀 맵고 짜고 달고

가끔 바삭바삭 타는 소리 너머

나는 세상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나온

존재하지 않은 가을이었다

부엌에 앉아 작은 상을 성좌처럼 펴고

나의 언어를, 별을 찾다가 웅크린 어깨선이

어느 파도에 부딪혀 무너지는지 속이 거북하다

살다 남은 시간을 쪼개고

찬 손을 비비고

싱크대 속에 갇혀 몇 년째 속앓이 한 냄비를 닦고

예리한 어둠에 그을린 낯선 도시를 헹구며

깊은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세우고 국을 끓인다

파, 시금치 온통 날것인 것들이 불꽃으로 저를 살라

새로운 맛을 낸다

모든 사랑의 고통의… 뉘우침으로

한 그릇을 위한 부엌의 노동엔 어떤 해석도 필요치 않다

성찬식 밀떡처럼 작은 평화를 입에 물고

부조의 문을 밀고 나와

식구들의 잠든 귀를 깨끗하게 여는 저 폐경기의 새벽!

 

 


 

 

김지희 시인 / 여자의 시간을 통째로 넣고

 

 

잘 만져지지 않는 겨울 끝자락

설핏한 해 달래며 만두를 빚는다

허기진 저녁을 채울 만두 빚으려면

각각 따로 노는 것들이 없도록

제 살 여미듯 다듬은 육류며

어둠을 마시는 풀잎

달의 큰 통 안에 있는 여자,

그림자 애인까지 모두 잘 여며

피 속으로 끌어안아야 한다

자칫 봉재선이 뜯어지면

자식들 환한 이마 돌보느라

책 한 권 읽을 수 없는 시간이 잘려 나간다

찬바람 숭숭 새는 문풍지,

거친 파도 목젖까지 차오르던 삶

잘 여며 주시던 어머니 보자기처럼 꽉 싸매야 한다

껍질과 속을 구분해서 먹으면

고비고비 넘어온 사람살이 맛까지 없어진다

영혼을 채워주지도 못한다

구멍 난 양말 같은 시대에

계산하고 재는 연인들 가슴 속 열어 보면

깨진 유리조각처럼 상처가 알알이다

유리에 새겨진 모자이크 사랑보다

통째로 쏟아 내는 사랑을 위해

온몸 사르는 불을 지핀다

꿰매진 사랑 그 조각보를 볼 때마다

봉재선 사이사이 한 여자의 살점이 묻어나는 것 같다

온몸 조각조각 붙여진

아내 어머니 며느리 딸… 그 모든 모습들을 녹여

온전한 한 사람을 빚는다

난파된 구름 조각 같은

꿈을 한데 모아 만두를 빚는다

꽃샘추위로 풀리는 여자의 시간을 통째로 넣고

캄캄한 가슴 적셔주는 별빛으로 속을 채운다

한 남자와 아이들이

꿈의 풍선 터질 때까지 힘껏 불어

여자의 속 부풀고 부풀다 결국 울음 되어 터질까봐

겨울 밤 흩어진 여자들을 모아

훈훈한 향기 가득한 만두를 빚는다

무수한 달의 이야기 품은 온전한 여자를 빚는다

 

 


 

 

김지희 시인 / 향수 만들기

 

 

먼저 도시 아파트 현관문처럼 꽉 닫혀 있는

연인들의 가슴을 열어

거기에서 기본 향을 따오는 겁니다

톡 쏘는 장미나 허브 향 같은 새벽 공기를 미량 넣습니다

그리고 세상 팍팍한 골목을 감싸주는

순도 높은 봄비도 첨가하면 좋겠죠

거기다가 오래전 덮어둔 우울한 꿈을 불러오는

여가수의 노래도 한 스푼 가미합니다

또 잠자리, 나비 날아다니는 바다도 넣어주세요

좀 더 독한 것을 원하시면

햇살 한 자락 같은

찐한 덧없음의 시도 첨가해보세요

(참고로 물만 넣으면 향기가 빨리 달아납니다)

이젠 플라스크에 넣은 것들을 힘껏 저어주세요

파열음을 내며 한바탕 소용돌이가 일어나도

실패할까 두려워 마세요

25도 정도의 가슴에 보관, 한 오백년 숙성시켜 주시면

용기 맨 위 안개꽃처럼 다가오는 것이 보이지요?

타인처럼 스쳐가는 하루를 여과해

한 방울 한 방울 가라앉혀 보세요

바닥에 고이는 그것이 향수입니다

향수 컨셉은-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가슴에 흐르는 바다의 물살입니다

향수 이름은-내안의 바다, 불혹의 암살,

그로테스크… 어떤 이름이라도 붙일 수 있습니다

당신의 자유입니다

 

시집『토르소』(2015년)에서

 

 


 

김지희 시인

경북 성주에서 출생. 2006년 《사람의문학》으로 등단. 2014년 《영주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토르소』 출간(2015). 문학에세이집 『사랑과 자유의 시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