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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경호 시인 / 세상을 뒤집을 것 같은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7.
제목 없음

강경호 시인 / 세상을 뒤집을 것 같은

-하재봉 시인

 

 

해금이 안 된 팔십 년대

사당동 가는 4호선에서

백석과 임화를 읽고 있을 때

그가 내게로 다가왔다

북으로 간 시인들을 몰래 만났던

우리는 의기투합하여

방배동 어디께 포장마차에서 밤을 지샜다

신춘문예로 등단한 가난한 시인과

이름없는 잡지사 기자

불온하다는 이유만으로도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아직 서른 살이 안 된 우리가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치기라고 하지 않겠다

30년도 훨씬 넘어서

지독하게 취했던 시에서 멀어진 듯 보이지만

보리수시낭송회에서 시를 읽던

세상을 뒤집을 것 같은 그를 기억한다

대학로에서 첫 시집을 불살랐던 신성한

그의 시간을 잊지 못한다

세상은 변했다지만

나의 심연에 스물 몇 살의 패기있고 순수한

아름다운 청년이 살고 있다

 

ㅡ 『시와사람』(2021, 여름호)

 

 


 

 

강경호 시인 / 건망증

 

 

바람이 불자 상수리나무가

아나 먹어라

툭, 상수리 몇 개를 떨어뜨리자

다람쥐 한 마리

한참 동안 맛있게 식사하고

몇 개를 입에 물고 언덕 위로 올라가더니

나뭇잎 속에 재빨리 숨긴다

눈이 내린 날

먹을 것이 궁한 다람쥐

언덕 위 눈발을 뒤지다 그만둔다

저토록 앙증맞은 것이

숨겨놓은 식량을 찾지 못하다니

쯧쯧, 어린것이 벌써 건망증이라니,

사람인 나도

나이 들수록 기억력이 없어지는데,

책을 읽다가 책장을 넘기면

앞장이 생각나지 않고

아내는 벌써 솥을 몇 번이나 태워먹고

팔순의 어머니는 손에 들고도 찾으신다

사람의 건망증은

사람 구실을 못하게 하는데

다람쥐의 건망증은

언덕을 푸르게 한다

 

 


 

 

강경호 시인 / 세 살 아버지

 

 

부지런하고 셈을 잘 하던 아버지

늘 엄하고 잘 웃지 않던 아버지

지팡이 짚고 세 발로 걸으시네

어머니 말씀 잘 안 듣고

말썽만 부리시네

대꾸는 안하고

히죽히죽 웃기만 하시네

팔십 년 전 세 살 적 아이 되어버렸네

 

맛난 것만 골라 잡수는 아버지께

생선가시 발라 숟가락에 얹어드리면

내 막내딸 세 살처럼 잘도 받아 잡수시네

길을 가다 힘에 부치면

업어 달라 조르는 철없는 우리 아버지

 

장성한 자식들 바라보며

아침 나팔꽃처럼 환해지네

점점 나이를 까잡수는 아버지

팔십 년 기억 방전되고 있네

덧셈 뺄셈 구구단 모두 잊고

오늘은 배부른 젖먹이처럼

곤하게 낮잠을 주무시네

 

 


 

강경호 시인

1958년 전남 함평에서 출생. 광주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 졸업.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1977년 월간 《현대시학》 으로 등단. 시집으로 『언제나 그리운 메아리』,『알타미라동굴에 벽화를 그리는 사람』, 『휘파람을 부는 개』『함부로 성호를 긋다』『잘못 든 새가 길을 낸다』 등이 있음. 2010년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수상. 현재 계간 『시와사람』 발행인 겸 주간.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출강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