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호 시인 / 세상을 뒤집을 것 같은 -하재봉 시인
해금이 안 된 팔십 년대 사당동 가는 4호선에서 백석과 임화를 읽고 있을 때 그가 내게로 다가왔다 북으로 간 시인들을 몰래 만났던 우리는 의기투합하여 방배동 어디께 포장마차에서 밤을 지샜다 신춘문예로 등단한 가난한 시인과 이름없는 잡지사 기자 불온하다는 이유만으로도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아직 서른 살이 안 된 우리가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치기라고 하지 않겠다 30년도 훨씬 넘어서 지독하게 취했던 시에서 멀어진 듯 보이지만 보리수시낭송회에서 시를 읽던 세상을 뒤집을 것 같은 그를 기억한다 대학로에서 첫 시집을 불살랐던 신성한 그의 시간을 잊지 못한다 세상은 변했다지만 나의 심연에 스물 몇 살의 패기있고 순수한 아름다운 청년이 살고 있다
ㅡ 『시와사람』(2021, 여름호)
강경호 시인 / 건망증
바람이 불자 상수리나무가 아나 먹어라 툭, 상수리 몇 개를 떨어뜨리자 다람쥐 한 마리 한참 동안 맛있게 식사하고 몇 개를 입에 물고 언덕 위로 올라가더니 나뭇잎 속에 재빨리 숨긴다 눈이 내린 날 먹을 것이 궁한 다람쥐 언덕 위 눈발을 뒤지다 그만둔다 저토록 앙증맞은 것이 숨겨놓은 식량을 찾지 못하다니 쯧쯧, 어린것이 벌써 건망증이라니, 사람인 나도 나이 들수록 기억력이 없어지는데, 책을 읽다가 책장을 넘기면 앞장이 생각나지 않고 아내는 벌써 솥을 몇 번이나 태워먹고 팔순의 어머니는 손에 들고도 찾으신다 사람의 건망증은 사람 구실을 못하게 하는데 다람쥐의 건망증은 언덕을 푸르게 한다
강경호 시인 / 세 살 아버지
부지런하고 셈을 잘 하던 아버지 늘 엄하고 잘 웃지 않던 아버지 지팡이 짚고 세 발로 걸으시네 어머니 말씀 잘 안 듣고 말썽만 부리시네 대꾸는 안하고 히죽히죽 웃기만 하시네 팔십 년 전 세 살 적 아이 되어버렸네
맛난 것만 골라 잡수는 아버지께 생선가시 발라 숟가락에 얹어드리면 내 막내딸 세 살처럼 잘도 받아 잡수시네 길을 가다 힘에 부치면 업어 달라 조르는 철없는 우리 아버지
장성한 자식들 바라보며 아침 나팔꽃처럼 환해지네 점점 나이를 까잡수는 아버지 팔십 년 기억 방전되고 있네 덧셈 뺄셈 구구단 모두 잊고 오늘은 배부른 젖먹이처럼 곤하게 낮잠을 주무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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