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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광호 시인 / 깨끗하고 검은 목욕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6.

김광호 시인 / 깨끗하고 검은 목욕

 

 

애야, 어디서 자꾸 더러운 모래를 묻혀오니

 

온 식구가 오래된 사진첩 앞에 옹기종기 모여

한 장의 사진을 가리키는 장면에서

 

‘모래를 한 움큼 집어 먹고 울고 있는 이 아이가 바로 너야.’

온 식구가 한바탕 즐겁게 웃고 나면

 

이제 그만 씻고 올게요

백사장의 모래처럼

 

누군가 희고 여린 손가락으로 써놓고 간 이름을 깨끗하게 지우고, 발자국이 새겨지지 않는 작고 무력한 존재라는 사실에 기뻐하면서 몸을 닦았습니다

 

무릎에 박힌 모래를 털어낼 수 없어요

 

털어낼 수 없는 모래를 모아 한 움큼 집어 먹었습니다

모래를 집어 먹는 장면은 누가 봐도 즐거운 사진이니까

 

모래시계의 시간은 누가 집어 먹은 모래일까

모래시계를 옆자리에 눕혀놓고

 

밤새 서로의 검은 내력을 털어놓았습니다

 

와, 검은 모래 해변이다

 

우리를 발견한 햇빛이

둥근 튜브를 들고 나타나면

 

곁에 있으면 햇볕이 되는 햇빛과

물구나무가 내력인 모래시계와

서로의 몸을 검은 모래에 묻으며 놀았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 유리창에 비친 모습이

모래를 집어먹고 울고 있는 아이 같아서

기쁜 마음으로 달려갔습니다

 

온 식구가 나를 가르키며 환하게 웃을 수 있도록

 

현관문을 열었는데

거실에는 즐겁게 사진첩을 보고 있는 식구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어디에도 없고

 

얘야, 씻고 밥 먹어라

 

조용히 작은 방의 문을 닫으면

식구들의 웃음소리가 철썩철썩 파도 소리처럼 들려와서

파도 소리로 몸을 닦았습니다

 

작고 작아지도록

 

내 사진 속

내가 집어 먹었던 모래로

 

내 작은 침실이 온통 침식될 때까지.

 

계간 『리토피아』 2021년 여름호 발표

 

 


 

 

김광호 시인 / 핑크 카펫

 

 

미래에게 양보하는

빈자리

 

두려움이라는 공용어로는

번역할 수 없는 타국의 Campaign

꿈이나 희망이라는 목적어로는

빈자리만을 번역하고

 

핑크 카펫에 앉은 불법 체류자는 가만히 자습서를 꺼낸다

 

지금 앉아있는 자리를 이해하고 싶어서

안녕과 죄송과

다 알아요 조금 몰라요

문맹인과 색맹인의 태도와

 

핑크의 의미는 몇 쪽에 나옵니까

 

자습서를 10번 떼고 대학에 못 갔다는 사촌 누나. 그해 가족들은 모두 사촌 누나 얘기를 꺼냈다. 사촌 누나 모르게. 나는 사촌 누나에게 물려받은 자습서로 대학에 들어갔지. 그동안 사촌 누나는 원치 않는 아이를 낳았고

 

눈초리를 맞으면 어디에 피멍이 드는지 아는 사람 손

모국어도 잘 모르는 모국에서

외국의 시를 읽고

망한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내가 너 같은 새끼 낳으려고

 

지하철 안내방송은 몇 년째 흘러나오는데

고개를 들면 깜박 지나쳐버린 목적지

 

금방이라도 원치 않는 아이를 낳을 것만 같아서

서둘러 시집을 가방에 넣고

물려받은 자습서를 꺼내고

 

상상 임신된 미래를 자습했지

 

불법 체류자는 졸다 깨어

급히 지하철을 내리고

 

 

그가 잠깐 꾼 꿈이 무엇이었는지

물려받은 자습서에 연습 문제로 나왔지만

 

정답란은

빈칸이었고

 

핑크 카펫의 빈자리를 바라보는

지친 얼굴들의 눈빛에서 핑크빛이 돌았다.

 

계간 『리토피아』 2021년 여름호 발표

 

 


 

김광호 시인

1984년 전남 곡성에서 출생. 경인교육대학교 졸업. 아주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 받음. 2020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 현재 초등학교 교사, 글발시인축구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