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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하정임 시인 / 저녁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6.

하정임 시인 / 저녁

―그리운 것은 늘 멀리에만 있다

 

 

태양은 산의 모서리

껴안으며 죽고

당신은 어느 천지에서

뒤돌아앉아

햇빛보다 밝은 그림자

안고 죽는가

 

- 하정임 <시인세계> 2004년 가을호

 

 


 

 

하정임 시인 / 아직은 꽃 피울 때

 

 

막을 길이 없다

무더기로 벌어지는 꽃들의 붉은 말이며

저 팔짱을 끼고 피어나는 개나리의 섣부른 외출이며

서로 몸 섞으며 둥글어지는 거친 자갈들의 울음이며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흐르는 강물들의 조바심이며

아직 깨어나지 못한 번데기 속 나비 날개의 분주함이며

비를 내린다고 하늘을 쑤셔대는 새들의 상처난 부리며

아카시 등걸 사이로 새 집을 짓는 개미턱의 연약함이며

 

막을 길이 없는 것들아

빈 방 주인을 기다리는 먼지의 애절함 같은 것들아

사랑하는 애인의 속눈썹 위에서 떨고 있는 것들아

아직은 꽃 피울 때

아침에는 눈 내리고 저녁에는 봄비 상처난 부리 닦아준다

 

 


 

 

하정임 시인 / 시에라리온

 

 

  지금을 지나가면 총이 사라지나요 야자수 이파리는 다리를 잘라가던 칼처럼 보이는 걸요 누나의 뱃속에서 아기를 꺼내 총부리에 걸고 다니던 일을 이제 동생에게 시키고 더 강한 허기를 들고 사냥에 나서요 우리는 무서운 벌레, 고향에는 돌아갈 수 없고요 엄마조차 눈앞에서 눈을 감아버리는데 그 눈을 찢어주고 싶어요

 

  마약의 핏줄을 따라 우리는 더 강한 소년병이 되었어요 핏줄의 끝에서 적의 모가지를 겨누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의 심장을 찢고 다이아몬드를 빼앗아갈 것 같았어요 아프리카의 태양이 열이 올라 발광을 하면 사자의 산에서 여자아이들은 발가벗겨지고 우리는 기억되지 않을 열 살의 소년병, 거짓말처럼 적의 팔다리를 자르고 피가 흐르는 계곡에서 검은 두 눈알을 씻었어요 적의 팔다리가 떠내려오면 내 것처럼 끼우고 도망치고 싶었어요

 

  학교에는 아이들이 프리타운의 정신을 이어받아 자유를 배우고요 소년병인 우리는 갈 곳을 몰라 제국의 다이아몬드를 뽐내는 사람들 앞에서 구걸을 하지요 다이아몬드를 낀 커다란 손가락, 팔목을 잘라가던 칼로 단번에 잘라버릴 수도 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목발을 짚고 축구를 하는 것뿐인가요 마약을 우리에게 주사하던 우리의 주인은 이제 간판을 바꿔달고 거리를 활보하는데 이렇게 지금,을 지나가면 총이 사라지나요

 

- 『문학·선』2009년 겨울호

 

 


 

하정임 시인

1977년 경상남도 하동에서 출생. 부산대학교 지구과학교육과 졸업. 제4회 계간 《시인세계》 신인작품 공모에 〈아직은 꽃 피울 때〉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2000년 부대(부산대학교)문학상을 수상. 2004년 제4회 계간 <시인세계> 신인작품공모에 '아직은 꽃피울 때'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