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임 시인 / 저녁 ―그리운 것은 늘 멀리에만 있다
태양은 산의 모서리 껴안으며 죽고 당신은 어느 천지에서 뒤돌아앉아 햇빛보다 밝은 그림자 안고 죽는가
- 하정임 <시인세계> 2004년 가을호
하정임 시인 / 아직은 꽃 피울 때
막을 길이 없다 무더기로 벌어지는 꽃들의 붉은 말이며 저 팔짱을 끼고 피어나는 개나리의 섣부른 외출이며 서로 몸 섞으며 둥글어지는 거친 자갈들의 울음이며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흐르는 강물들의 조바심이며 아직 깨어나지 못한 번데기 속 나비 날개의 분주함이며 비를 내린다고 하늘을 쑤셔대는 새들의 상처난 부리며 아카시 등걸 사이로 새 집을 짓는 개미턱의 연약함이며
막을 길이 없는 것들아 빈 방 주인을 기다리는 먼지의 애절함 같은 것들아 사랑하는 애인의 속눈썹 위에서 떨고 있는 것들아 아직은 꽃 피울 때 아침에는 눈 내리고 저녁에는 봄비 상처난 부리 닦아준다
하정임 시인 / 시에라리온
지금을 지나가면 총이 사라지나요 야자수 이파리는 다리를 잘라가던 칼처럼 보이는 걸요 누나의 뱃속에서 아기를 꺼내 총부리에 걸고 다니던 일을 이제 동생에게 시키고 더 강한 허기를 들고 사냥에 나서요 우리는 무서운 벌레, 고향에는 돌아갈 수 없고요 엄마조차 눈앞에서 눈을 감아버리는데 그 눈을 찢어주고 싶어요
마약의 핏줄을 따라 우리는 더 강한 소년병이 되었어요 핏줄의 끝에서 적의 모가지를 겨누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의 심장을 찢고 다이아몬드를 빼앗아갈 것 같았어요 아프리카의 태양이 열이 올라 발광을 하면 사자의 산에서 여자아이들은 발가벗겨지고 우리는 기억되지 않을 열 살의 소년병, 거짓말처럼 적의 팔다리를 자르고 피가 흐르는 계곡에서 검은 두 눈알을 씻었어요 적의 팔다리가 떠내려오면 내 것처럼 끼우고 도망치고 싶었어요
학교에는 아이들이 프리타운의 정신을 이어받아 자유를 배우고요 소년병인 우리는 갈 곳을 몰라 제국의 다이아몬드를 뽐내는 사람들 앞에서 구걸을 하지요 다이아몬드를 낀 커다란 손가락, 팔목을 잘라가던 칼로 단번에 잘라버릴 수도 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목발을 짚고 축구를 하는 것뿐인가요 마약을 우리에게 주사하던 우리의 주인은 이제 간판을 바꿔달고 거리를 활보하는데 이렇게 지금,을 지나가면 총이 사라지나요
- 『문학·선』2009년 겨울호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왕노 시인 / 빅토르 최, 그 늙은 꿈 (0) | 2021.09.27 |
---|---|
김광호 시인 / 깨끗하고 검은 목욕 외 1편 (0) | 2021.09.26 |
김왕노 시인 / 진화를 위하여 (0) | 2021.09.26 |
한창옥 시인 / 빗금이 풀어지고 있다 외 2편 (0) | 2021.09.26 |
강순 시인 / 밤의 나라 외 1편 (0) | 2021.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