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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순 시인 / 밤의 나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6.

강순 시인 / 밤의 나라

 

 

피노키오가 내 속에 살고 있어서

심장은 초록색

 

나를 혼내면 자꾸 옆으로 삐져나와

다리가 허공에서 바빠져

 

원하지 않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면

나는 당나귀 울음이 될래

 

사람 이전의 나를 생각하면

나의 나라는 나의 나라

 

고래 몸속에 외롭게 웅크린 내가

진짜 나일지 몰라

 

오늘은 암막커튼을 치고 종일

꺼이꺼이 울음을 연습 했어

 

코가 점점 길어져서 새들이 둥지를 트는

말썽쟁이 고집쟁이 벌거숭이 나다운 나라

 

지도에 없어서 천만다행인 나라는 나라

 

사람 되기를 소망하는 나의 나라는

남몰래 밤에만 세워지네

 

나를 축복하는 이들과 나를 버리려는 이들

단숨에 한 영토 안에 그릴 수 있는

노란 칭찬과 붉은 죄들이 모두 깨어나는

작은 방

 

피노키오 하고 부르면

응 하고 부은 얼굴 내밀며

죄의 목록에 박박 두 줄을 긋는

작은 비상구가 빛나는 나라

 

도망가지 않았는데 돌아갈 수 없는

밤에 피었다 새벽에 사라지는

그 나라

 

 


 

 

강순 시인 / 꽃이라니!

 

 

당신이 나를 꽃이라 불렀다

​꿈속에서 당신의 뺨을 때렸다

​꽃이라니!

​내가 꽃이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

 

​울퉁불퉁한 시간에는 보드라운 잎이 피어날

​구역이 없지

 

​꽃이라니

​그런 매끈한 단어는

​늑대거미보다 못해

 

​당신의 붉은 거짓말이 차라리

​꽃에 더 가깝지

 

​행과 불행을 기념할 때만

​필요한 단어

​그게 나라니

 

주인과 시종 사이에서

피지도 시들지도 못하는

나의 색은

 

미혹(迷惑)이 너무 많아

잎의 감정이 아직 미정이지

 

계간 『시와 경계』 2021년 봄호 발표

 

 


 

강순 시인

1998년 《현대문학》에 〈사춘기〉 외 4편으로 등단. 시집으로 『이십대에는 각시붕어가 산다』,『즐거운 오렌지가 되는 법』 등이 있음. 2019년 경기문화재단 우수작가 기금 수혜.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수료.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