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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창옥 시인 / 빗금이 풀어지고 있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6.

한창옥 시인 / 빗금이 풀어지고 있다

 

 

입과 귀

사이는 빗금 그어진 적막의 시간 오늘도 생에 갇힌 언어의 살 아프게 뜯어내며 빗금의 경계를 허무는 2111호 소년, 트이지 않는 목울대에 꾹꾹 박힌 유리조각 하나하나 빼어내는 울부짖음 같은 뜨거운 입김은 오랫동안 한낮 속으로 내려앉는다

 

온전한 입과 귀가 있어도 빌어먹는 사람들 모순에 간절한 바람 같은 외침은 혈육의 살 속을 파고드는 통증

 

귀와 입

사이는 통로 없는 공터, 나뭇가지마다 걸터앉는 바람을 향해 진종일 "흐으흥 흐으흥" 뼈 없는 언어의 허리를 틀며 빗금의 경계를 허문다 조각조각 터져 있을 속내 붙이고 꿰맨 겹겹의 가슴되어 세상 속으로 스며들어야 하는 이치를 아는 듯

응어리 들어앉은 눈동자는

푸른빛의 질긴 의미를 조금씩 알게 해주는 그,

푸른빛의 소리를 자꾸만 들려주는 그,

 

빗금이 풀어지고 있다

 

 


 

 

한창옥 시인 / 미로 찾기-시인이여! DMZ를 기억하라

 

 

 끝없는 길에 보이지 않는

 봄은 또 어긋난 길에서 맴을 돈다.

 

 등짐지고 오가던 어깨 무겁다. 155마일 DMZ의 오리무중,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허리에 휘감겨 팽팽한 눈시울 뜨겁다. 길은 어쩌다 또 길을 잃었다. 아득한 발길에 놓친 날이 반보기하는 언덕에 주저앉았다. 눈에 젖어드는 저것은 안개, 저것은 바람, 어려운 길이었다는 귀엣말이 들린다. 다가서지 못하는 발끝이 아프다. 어둠을 움켜쥐고 도래질치는 누군가의 울음소리 듣는다.

 

 멀리 멀리 날아가는 새 한 마리, 그 부리에 쪽지 하나 적는다.

 

 


 

 

한창옥 시인 / 내 안의 표범

 

 

그래요......그래요

내 안에 표범이 들어왔어요

이슬같은 눈빛의 표범,

잠자던 풀들이 화들짝 깨어났고요

창 밖 회오리바람도 표범 울음으로 들려요

영혼의 주파수가 자꾸 엉켜요

일제히 일탈 중인 삶의 의문부호들

건망증 많던 자물쇠는

 

이미 길을 잃어버렷어요

내게 깃든 표범이 자꾸 아파와요

뜨거운 가슴으로 안아줄 수 있어요

긴 다리 표범은 몸을 둥굴게 접어요

태고 적 생명 아름다운 태아 같아요

너무 소중해 안쓰러워요

머리털에 배인 야생의 그리움이

눈물로 번져나가고 있어요

두 손으로 지그시 눌러줘요

뒤척이던 표범은 더 이상 울지 않아요

광야(曠野) 같은 고요가 내 몸을 통과할 때

난 알아요

 

내 안의 표범이 자라고 있다는 걸

표범 우는 소리 쓸쓸해지면

가만히......가만히 잠재울 거예요

 

 


 

한창옥 시인

1982년 '바우방' 문학동아리 활동. 2000년 시집 『다시 신발 속으로』로 시작활동 시작. 시집으로 『빗금이 풀어지고 있다』(현대시시인선62)와 『내 안의 표범』이 있음. 계간 『부산시인』 편집주간 역임. 현재 계간 『포엠포엠 POEMPOEM』 발행인 겸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