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연 시인 / 비폭력 대화
식도가 길어 음식이 소화될 때까지 생각이 많은 기린에게는 먼저 말을 걸기가 거북스럽다 자기만의 성대로 울음소리를 발명하니 알아듣기도 어렵다 당신이 참을성 없이 쏟아낸 말을 부드럽게 주워 담는 긴 혀와 우물거리는 입술 정도는 알아볼 수 있다 상대의 타액이 섞인 무자비한 말조차 시간과 함께 꼭꼭 씹을 줄 안다 기린에게도 뿔은 있다 그러나 결투를 포기한 뿔은 제 피부를 뚫고 나올 정도의 분노나 증오 같은 격렬함이 없다 그 끝은 이제 둥글고 둥글어져 고요한 우주를 닮아가는 중이다 콧등으로 미모사를 건드리면서 요리조리 아카시아 새싹을 살피면서 초식동물에 어울리는 순한 생각을 수십 번씩 접었다 펼쳐 보는 것이다 기린은 지그시 어금니에 힘을 준다 혀를 구부려 입 속 공기의 흐름을 막는 것은 말이 만드는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날 선 말이 방심한 제 앞다리를 낫처럼 썩뚝 잘라낼 수 있음을 경계하는 것이다
이 순간 불같은 성정의 자칼은 컹컹거리며 바오밥나무 둥치를 수십 바퀴째 돌고 있다 몸이 가볍고 다리 근육이 강하여 바람처럼 움직이는 이 짐승은 자신의 꼬리가 너무도 아름다운 것일까 무모한 회전을 멈출 것 같지 않다
한정연 시인 / 늪에 빠진 개
이 누런 절망의 깊이는 소리가 없다 수직의 모래가 가랑이 사이로 끊임없이 흘러내리며 소리 없는 공포를 전염시킨다
밤이 오지 않았으나 천지간을 분간할 수 없으니 시간을 가늠할 수도 없다 개는 제 울음의 타이밍을 잃은 것이 분명하다 축 늘어진 귀와 치켜뜬 눈동자엔 한 가닥의 전의조차 발견되지 않는다 검게 타버린 태양의 흔적이 머리 위에 남아 있을 뿐 광기가 아니라면 살아남을 수 없기에 천진함이란 폭력보다 역겹다 푹푹 빠져드는 모래 늪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우고 먼지를 뒤집어쓴 하늘이 희번득 돌아눕는다
사방에서 모래바람이 몰려온다 눈을 뜰 수 없는데 소리마저 삼켰다
천천히 묽은 수프를 떠먹으며 그는 치매처럼 바라보았을 것이다 침실과 계단과 거실 벽과 핏물 뚝뚝 흘리며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를 살아남은 자신과 그 후손들을
이성이 잠들고 내 안의 온갖 괴물이 깨어나면* 몽매와 야만과 그 아비규환을 지나 우리는 귀머거리가 되는 것이다 주둥이만 간신히 내민 채 왜 이러고 있는지 여기가 어딘지 내가 누군지 거짓과 공포의 근원에 대한 의심도 없이 아우성 속에 나를 잊는 것이다
형체가 뭉개지고 질문들이 단순해진다 발자국이 남지 않는다 바닥에 닿지 않는다
광장은 거대한 모래 늪이다
*고야의 그림과 판화집 ‘Los Caprichos(변덕)’의 부제
한정연 시인 / 잠긴 귀
깊고 어두운 곳 천천히 살갗을 조여 오는 고요 춥고 무거운 물의 시간
눈꺼풀을 덮지 않은 채 수만 번의 삭망을 거듭했다 고막이 터져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으나 끈질기게 이어지는 미세한 파동이 신경을 누른다 쉽게 화석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찢겨진 난파선 안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은 다만 나의 지느러미 내가 그린 물무늬를 따라 반복하여 흐르는 일도 낯선 신호체계를 찾아 떠도는 일도 홀로 오래되었다
젖는 것이 두렵기만 하였다 거대한 잠수정처럼 일상이 가라앉은 이후 물줄기가 새어들었고 비늘이 돋아났다 퇴화된 귀는 점점 피부를 파고들었다 귀가 모은 소리의 대개는 떠돌다 휩쓸리고 깨어진 이름들이거나 선량한 기도, 울음의 덩어리 사랑하는 이들의 마지막 안부였다 모아진 소리는 이석(耳石)이 되어 귓속을 구르고 자꾸만 기울어지는 몸을 끌어당겼다
더 이상 지상의 노란 불빛이 닿을 수 없는 여기는 심해, 부재의 공간
여러 개의 손을 놓쳐버렸고 충분히 잊혔으므로 더 이상 출렁이지 않는다 심연 속 보이지 않는 힘들의 근육이 풀어지듯 끔찍한 시간조차 뼈와 살을 헐어내는 곳 선명한 평형감각만 남아 영혼을 묻고 화석이 되는 세계
가장 넓은 정적
한정연 시인 / 홈 베이커리
풍성하게 부풀어 오른 빵의 시간이야 부드러운 속살을 벌리면 고소한 냄새 가득 미래가 펼쳐지지 서툴게 이국어를 공부하는 여자는 늘 알람이 울리기 전 눈을 뜨는 이유를 알까
참으로 폭신도 하다 빵의 육질 평생 이토록 부드럽게 환대해 준 이 있었던가 가장 외로운 영혼도 가끔씩은 행복할 거야 깨끗한 앞치마를 두르고 두툼한 손바닥을 탁탁! 하얀 밀가루와 설탕이 쏟아지고 빛 가운데 찬란한 입자로 흩어지는 광경 화덕에 누운 빵의 육체여 우리의 영혼이 그처럼 붉게 달궈지고 향기로워지듯이 두터운 껍질을 얻는 시간이야 이로운 효모가 그러하듯 세상 속 파고들수록 더욱 그윽하고 유연해지리라는 기대로
주문같이 불명확한 어순들에서 피어오르는 말의 정령을 믿었던 걸까 여자의 웅크린 내면에 기분 좋은 소음이 일고 이름 모를 활기로 걱정이 없구나 낯선 땅 이방인이 마주치게 되는 호기심 어린 눈동자와 물기 어린 정원의 둥근 식탁 같은 것 처음 만난 사람들과도 갓 구운 빵을 권하며 손길을 섞는
우리의 회화는 유창하고 오늘의 레시피는 문제가 없었으므로 서둘러 낙관론을 펼치는 시간이야
빵처럼 부푼 얼굴들이 눈앞에서 시퍼렇게 식어버리기 전에 이 아침, 누구도 기억 못 할 공복 앞에서
한정연 시인 / 파수꾼
풍경을 비추지 못하는 밤의 호수를 내려다보는 고요한 시선이 있다 제대로 보려면 최대한 높은 곳을 올라야 한다 제대로 듣기 위해 완전한 어둠을 기다린다 지붕과 지붕들이 사라진 자리를 차가운 달빛이 채우고 비밀스럽게 출렁인다 발등을 올라타는 미지근한 바람이 좋아 발톱을 숨기고 부드러운 목을 늘린다
세계를 관장하려는 욕망이 아니다 플라타너스 커다란 낙엽을 들추거나 바퀴 밑으로 벽돌 속으로 어둠과 구석을 찾는 이유는 예감으로 가득 찬 지상의 불안 사이에서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점 하나가 폭발해 우주가 되는 이론처럼 잠시의 평화와 순식간에 무너지는 균형이 도처에서 피어나고 흩어지기 때문이다
한 남자의 성마른 하루와 한 여자의 불쾌한 성실과 그 사이의 거리에 대하여 깜박이는 가로등과 흔들리는 별에 대하여 고양이는 태도를 갖지 않는다 아이들은 스스로 슬픔을 재우는 법을 익힐 것이다
너무 가까운 것과 너무 먼 것은 어느 쪽이 더 절망적인가 달빛 너머의 몽상과 창가에 고인 불빛은 어느 것이 더 위험한가 고양이가 당신 주변을 맴맴 돌다가도 자주 멈칫, 하는 것은 더 이상의 애정을 거둬들이는 까닭이다
다만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에서 조금 더 지켜보는 일 숨죽이며 정지한 듯 묵묵한 시선을 견뎌내는 일 밀려오는 새벽 겨우 낯선 기척을 발견하고는 재빠르게 눈알을 바꿔 다는 일 떠나온 세계를 향하여 나팔을 길게 부는 일
한정연 시인 / 각성의 내부
푸른 과일 한 알을 쥐고 와삭 세상을 깨뜨릴 듯 입을 한껏 벌렸던 한밤의 과수원으로
개들이 컹컹 짖었어 온천으로 유명하단 시내를 한참 벗어나 외딴곳 낯선 공기가 섞인 쓸쓸한 목청이었지
진짜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며 마음 놓기로 한 거야 두 눈을 가리고 누군가의 전망과 계획에 의지하여 발이 푹푹 빠지는 두엄 밭에 코를 처박고는 감각이 마비되었던 거야 향긋한 과일 냄새가 사방에서 진동했고 달맞이꽃과 강아지풀 개망초가 무더기로 흔들릴 때 푸른 별빛의 강물 소리를 들었으니까 사지가 당겨진 채 낮 동안의 불볕을 견뎠을 안개 속 복숭아나무는 순교자처럼 빛났지
너는 자주 뒤돌아보는 나의 어깨를 네 쪽으로 당겼고 질문 대신 뜨거운 심장을 꺼내 보이며 너를 사랑하기로 결심했구나 나는 쉽게 망가지고 버려질 것이었지 앞으로도 계속 잘못 살아질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지만 사그라지는 여름 위에서 우린 잘 버틴 거라고 약간의 비밀을 공유했으니 불온한 시대의 공범이라고 선의와 악의를 번갈아 베풀며 너는 내게 욕망을 가르쳤구나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아무것도 원한 적 없는데 주렁주렁 익지 않은 열매들을 머리 위에 매달고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너는 왜 자꾸 나에게 화를 냈던 거니
이제 내가 알고 싶어 해 내 속의 너를 나를 숙주 삼으며 두개골을 갉아 먹는 너의 이유를 너로 인해 특별해진 나를 어쩌면 좋겠니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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