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규 시인 / 다섯째 누나
3남 4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어머니 일찍 여의고 아줌마 같은 손위 누나들 틈에서 자랐다 어느새 나도 늙었고 이미 몇몇 형과 누나는 세상을 떠났다 어느 날인가 노각 오이 같은 영감태기에게 잔소리하는 노처의 얼굴 쳐다보니 문득 둘째 누나 모습이 떠올랐다 김치 맛있게 담그고 바느질 잘하고 부지런한 살림꾼이었던 그 누나가 막내 동생 야단치던 때와 똑같다 나이 들면서 또 하나 깨닫느니 마누라가 늙으면 누나가 되는구나
김광규 시인 / 창피한 사이
좁은 길 마을버스는 너무 복잡해 타고 다니기 힘들어 시장 보는 아줌마들 짐 보따리 붐비고 노약자에게 자리 양보하는 젊은이도 드물지 손잡이에 몸 매달고 서 있는 할머니도 모른 척 버티고 앉아 끊임없이 문자질하던 아가씨 별 미용실 앞에서 내려 계속 핸드폰 걸면서 언덕길 올라가네 그런데 왜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르나 안경 고쳐 쓰고 자세히 보니 어느 틈에 노랑머리 물들이고 핫팬츠 새로 사 입은 우리 딸내미 아닌가 전철이나 마을버스에 실려 다니는 우리 노틀은 바로 저 아아의 창피한 부모 아닌가
김광규 시인 / 남해 푸른 물
창밖으로 남해의 푸른 물 보인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에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햇빛 가끔 큰 화물선이 지나간다 파도 소리와 갈매기 노래 바람에 실려 바닷가 외딴 방 창문을 넘나든다 바다가 잔잔한 날은 영원이 어떤 색깔인지 보여주기도 한다 누워서 물을 바라보는 위안이 진통제처럼 편안할 때도 있다
김광규 시인 / 시칠리아의 기억
아직도 미진한 듯 희뿌연 연기 뿜어대는 에트나 화산 바라보며 낙소스 포구에 배를 대고 가파른 해안 언덕길 올라갑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색깔이 바뀌는 이오니아 해 타오르미나의 고대 원형극장 유적에 몇 개 남아있는 그리스 기둥들 선글라스에 비치는 관광객 모습 눈길 끄는 것들 너무 많지만 사진 한 장 찍지 않고 바라보기만 합니다 추억을 만드는 대신 잠깐 발걸음 멈추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돌아가자고 손짓하여 부를 때까지 그저 바라보기만 합니다 아무 증거도 남지 않은 시칠리아 여행의 기억이지요
김광규 시인 / 쉼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삶은 끊임없는 연속입니다 쉴 새 없이 뛰는 심장 숨 쉬는 허파 가슴속에 품은 사랑도 그렇지 않은가요 산책을 하다가 피곤하면 길가의 벤치에서 앉아 잠시 쉬어가듯이 우리의 삶도 사랑도 그렇게 가끔 쉴 수 있다면 좋으련만
김광규 시인 / 어제가 되어버린 오늘
귀에 익은 목소리 들린 것 같아 뒤돌아보니 저기서 그가 손짓하네 - 오래간만이야 악수를 건네려고 반갑게 다가서보네 그러나 다가갈 수 없네 밀랍 인형처럼 한자리에 서 있는 그와 나 사이의 거리를 좁혀지지 않네 하룻밤 사이에 생긴 간격 어제가 되어버린 오늘 안타깝게 마주 바라보지만 우리는 서로 육성으로 말할 수 없네 유현한 시공 속에서 잠시 공존할 뿐 기억의 강물 건너편에 그는 바위처럼 서 있고 나는 혼자서 자맥질하며 떠내려가고 있네 가위 눌린 꿈도 아닌데 지금 가슴 답답하고 숨 막히는 이곳에서 어제의 그 모습과 아쉽게 헤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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