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광규 시인 / 거짓말
대나무는 세월이 갈수록 속을 더 크게 비워하고 오래된 느티나무는 나이를 먹을수록 몸을 썩히며 텅텅 비워간다 혼자 남은 시골 흙집도 텅 비어 있다가 머지않아 쓰러질 것이다
도심에 사는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도 머리에 글자를 구겨 박으려고 애쓴다 살림집 평수를 늘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친구를 얻으려고 술집을 전전하고 거시기를 한 번 더 해보려고 정력식품을 찾는다
대나무를 느티나무를 시골집을 사랑한다는 내가 늘 생각하거나 하는 짓이 이렇다 사는 것이 거짓말이다 거짓말인 줄 내가 다 알면서도 이렇게 살고 있다 나를 얼른 패 죽여야 한다.
공광규 시인 / 독도
1. 동쪽 바다 망망대해를 휘젓고 다니는 동해대신이 있어 바람과 파도를 끌고 다닌다
검푸른 몸뚱이에 파랑을 지느러미로 달고 다니는 대신의 머리에 오 리가 넘는 두 바위 뿔이 있는데
어둠이 지배하던 어느 날 동해대신이 머리를 치켜들자 우주에 금이 가 땅과 물과 하늘로 나뉘었다
금이 간 틈에서 태양이 솟아올라 햇살이 바다에 내려와 반짝이기 시작했는데 두 뿔은 동도와 서도로 드러났다
대륙과 대륙에 딸린 섬에 햇살이 비치면서 만물이 아름다워지자 사람들은 골짜기에 동해대신을 모셨다
오래전 왜와 미국과 프랑스와 러시아와 영국 이런 서양의 배와 일본 군함을 맞았던 뿔
어부들은 그 뿔을 돌섬과 독섬이라 불렀고 우산도와 삼봉도와 가지도와 석도라고 쓰다가 지금은 독도라고 쓰고 부른다
2. 바위 뿔과 뿔 위로 해가 뜨는 죽변에서 540리 울릉도에서 220리 연중 8할반이 흐리거나 눈비가 내리는 섬
괭이갈매기와 바다제비가 서식하고 범고래와 돌고래가 오고 상어 떼와 가마우지가 다녀가고
강치가 바위에 올라앉아 컹컹 노래하는 개밀과 큰이식풀이 바랭이와 돌피가 자라는 곳이다
왕김의털아재비와 참억새가 자라고 금강아지풀과 민들레 해국과 갯제비쑥 얼굴이 해맑다
이런 풀잎과 풀꽃과 어울려 긴말벼룩잎벌레와 딱정벌레가 살고 나비와 파리와 노린재가 산다
매미도 벌도 있고 잠자리와 메뚜기도 있고 풀잠자리와 집게벌레와 톡토기가 산다
이런 곤충들을 보고 시베리아에서 동남아와 오세아니아를 오가는 철새와 나그네새들이 마실을 온다
새홀리기와 녹색비둘기 해오라기와 뜸부기와 붉은가슴밭종다리 할미새사촌과 흰꼬리좀도요가 오고
제비딱새와 좀도요 할미새와 솔딱새가 와서 쌀경단버섯을 가는 발로 툭툭 건드려보다 날아가는 섬이다
공광규 시인 / 병
고산지대에서 짐을 나르는 야크는 삼천 미터 이하로 내려가면 오히려 시름시름 아프다고 한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동물
내 주변에도 시름시름 아픈 사람들이 많다 이런 저런 이유로 아파서 죽음까지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최근에는 세 모녀가 생활고에 자살을 했다
그런데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 직장도 잘 다니고 아부도 잘 하고 시를 써서 시집도 내고 문학상도 받고 돈벌이도 아직 무난하다
내가 병든 것이다
공광규 시인 / 외포항
대구탕과 물메기국이 맛있는 거제도 외포항 어판장 나무상자에 대구들이 담겨 있다
대부분 두 마리씩 짝지어 담겨 있고 너무 큰 것은 한 마리씩 담겨 있다
상자 안에서 서로 매몰차게 등을 돌리고 있거나 다정하게 배와 배를 맞대고 있는 대구들 어느 것은 토라지듯 등과 배를 맞대고 있다
나무상자가 작은 여관방이거나 꼭 맞는 침대라는 생각이 든다
바람을 피워 평생 등을 맞대고 잔다는 선배도 생각나고 키가 너무 커 오랫동안 시집을 못 간 동창생도 생각난다 자주 토라지는 아내와 자는 내가 생각나 픽, 웃음이 나온다
죽어서도 한 상자에 담긴 대구들 아마 이들은 전생에 부부였을 것이다
오늘은 외포항 착한 대구장수가 되어 나무상자에 대구를 다정하게 담는 선업을 쌓아 다시 태어나고 싶은 날이다
공광규 시인 / 모텔에서 울다
시골집을 지척에 두고 읍내 모텔에서 울었습니다 젊어서 폐암 진단을 받은 아버지처럼 첫사랑을 잃은 칠순의 시인처럼 이젠 고향이 여행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얼굴을 베개에 묻지도 않고 울었습니다
오래전 보일러가 터지고 수도가 끊긴 텅 빈 시골집 같은 몸을 거울에 비춰보다가 폭설에 지붕이 내려앉고 눅눅하고 벌레가 들끓어 사람이 살 수 없는 쭈그러진 몸을 내려보다가
아, 내가 이 세상에 온 것도 수십 년을 가방에 구겨 넣고 온 여행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이런 생각을 지우려고 자정이 넘도록 텔레비전 화면을 뒤적거리다가 체온 없는 침대 위에서 울었습니다
어지럽게 내리는 창밖 흰 눈을 생각하다가 사랑이 빠져나간 늙은 유곽 같은 몸을 후회하다가 불 땐 기억이 오래된 컴컴한 아궁이에 걸린 녹슨 솥의 몸을 침대 위에 던져놓고 울었습니다
공광규 시인 / 곤줄박이 심사위원
소백산 구인사 법당에서 어린이 사생대회와 백일장 심사를 하는데 곤줄박이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 덮개 철사를 가는 발가락이 꼭 붙잡고 있다
나는 새 발가락이 깃털이 다칠까 봐 선풍기 스위치를 얼른 끄고 다가가 팔을 저으며 밖으로 내보내려고 하나 꿈쩍하지 않는 새
우리는 그냥 더위를 견디기로 합의했다
법당에 펼쳐 놓은 아이들 그림과 원고지들을 내려다보며 쫑알쫑알 심사하는 새
새는 왕년에 이 절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 스님일지도 모르겠다
심사위원이 한 명 더 늘어 심사가 잘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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