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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문재 시인 / 푸른 곰팡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8.

이문재 시인 / 푸른 곰팡이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구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2』(조선일보 연재, 2008)

 

 


 

 

이문재 시인 / 도보순례

 

 

나 돌아갈 것이다

도처의 전원을 끊고

덜컹거리는 마음의 안달을

마음껏 등질 것이다

 

나에게로 혹은 나로부터

발사되던 직선들을

짐짓 무시할 것이다

 

나 돌아갈 것이다

무심했던 몸의 외곽으로 가

두 손 두 발에게

머리 조아릴 것이다

한없이 작아질 것이다

 

어둠을 어둡게 할 것이다

소리에 민감하고

냄새에 즉각 반응할 것이다

하나하나 맛을 구별하고

피부를 활짝 열어놓을 것이다

무엇보다 두 눈을 쉬게 할 것이다

 

이제 일하기 위해 살지 않고

살기 위해 일할 것이다

생활하기 위해 생존할 것이다

어두워지면 어두워질 것이다

 

 


 

이문재 시인

1959년 경기 김포시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1982년 <시운동> 4집에  '우리 살던 옛집 지붕'으로 등단. 시집<내 젖은 구두를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88년) <산책시편>(94년) <마음의 오지>(99년) <제국호텔>(2004년). 김달진문학상(95년) 소월시문학상(2002년), 지훈문학상(2005년),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2014)>.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 현.시사저널 편집위원. 계간<문학동네>편집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