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재 시인 / 푸른 곰팡이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구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2』(조선일보 연재, 2008)
이문재 시인 / 도보순례
나 돌아갈 것이다 도처의 전원을 끊고 덜컹거리는 마음의 안달을 마음껏 등질 것이다
나에게로 혹은 나로부터 발사되던 직선들을 짐짓 무시할 것이다
나 돌아갈 것이다 무심했던 몸의 외곽으로 가 두 손 두 발에게 머리 조아릴 것이다 한없이 작아질 것이다
어둠을 어둡게 할 것이다 소리에 민감하고 냄새에 즉각 반응할 것이다 하나하나 맛을 구별하고 피부를 활짝 열어놓을 것이다 무엇보다 두 눈을 쉬게 할 것이다
이제 일하기 위해 살지 않고 살기 위해 일할 것이다 생활하기 위해 생존할 것이다 어두워지면 어두워질 것이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대철 시인 / 박꽃 외 11편 (0) | 2021.09.28 |
---|---|
김혜순 시인 / 잘 익은 사과 외 5편 (0) | 2021.09.28 |
공광규 시인 / 거짓말 외 5편 (0) | 2021.09.28 |
김광규 시인 / 다섯째 누나 외 5편 (0) | 2021.09.28 |
김광규 시인 / 폭설 외 5편 (0) | 2021.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