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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대철 시인 / 박꽃 외 1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8.

신대철 시인 / 박꽃

 

 

박꽃이 하얗게 필 동안

밤은 세 걸은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

 

벌떼 같은 사람은 잠 들고

침을 감춘 채

뜬소문도 잠 들고

담비들은 제 집으로

돌아와 있다

 

박꽃이 핀다

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린다

 

<1977년>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40』(조선일보 연재, 2008)

 

 


 

 

신대철 시인 / 오로라

 

 

떨고 있던 별들은

제자릴 찾아 반짝인다

지상엔 언 눈 위에 떠도는 눈

개마고원 친구가 사라진 뒤

길 녹이던 발걸음 흩어지고

개 짖는 소리 판자촌을 울린다

오, 난데없이 몰아치는 오로라

핏속을 어지럽게 흔들던 형상들

흔들린다, 발광한다, 후려친다

나에게서 얼음사막으로 내몰리는

저 사람, 내 몸 입고 내 말 흉내 내던

저 사람, 내 길 가고 내 꿈 꾸던

악몽 속의 얼굴들 멀어지고 그리워지고 아주 지워진다

 

 


 

 

신대철 시인 / 사람이 그리운 날

 

 

잎 지는 초저녁, 무덤들이 많은 山 속을 지나왔읍니다. 어느 사이 나는 고개 숙여 걷고 있읍니다. 흘러 들어온 하늘 일부는 맑아 져 사람이 없는 山 속으로 빨려듭니다. 사람이 없는 山 속으로 물은 흐르고 흘러 고요의 바닥에서 나와 합류합니다. 몸이 훈훈해집니다. 아는 사람 하나 우연히 만나고 싶읍니다.

無名氏,  

내 땅의 말로는

도저히 부를 수 없는 그대,,,,,,

 

 


 

 

신대철 시인 / 다시 무인도를 위하여

 

 

돛배가 섬을 떠난다, 비로소 살아 움직이는 바다, 툭툭 수평선이 끊어지고 있다. 돛배가 거쳐간 섬은 무인도(無人島), 떠날 사람 다 묶인 무인도(無人島), 그는 캄캄한 제 몸 속으로 기어들어가 모기 소리만 내놓고 아이를 불러들였다. 헤엄쳐 가 볼까? 저 배, 어디로 흘러가는 거죠? 아이는 아까부터 혼잣말을 하고 있다. 노을 속으로, ....노을은 차지할수록 남는 시간이지. 우리 도 그 일부분이야, 사람들 각자 조금씩 차지하고 있으니 까. 대개들 저 자신 노을이라 생각하지. 우리를 노을로 알고 오는 사람은 없을까요? 돛배는 가면서 짐을 내려 놓기만 한다, 어둠에 먹히도록 서로 멀어져 가는 사람들, 멀어져 가 섬의 한 끝씩 되는 사람 들. 돛배가 아주 꺼지기를 기다리다 아이는 잠들고, 잠자리엔 은은히 노을이 비치고 있다. 피가 따뜻해진다. 그는 잠든 아이의 꿈 속으로 아이를 들여 놓고, 그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를 단 한 번 야생(野生)이게 하는 “우리를 노을로 알고 오는 사람은 없을까요?” 황홀하게 펴오르는 이 노을말도 꿈 속에 발갛게 비치어 넣고, 그는 몸 밖으로 기어나왔다. 맑다, 아무도 살지 않는 시간, 섬의 별이란 별은 하늘로 전부 올라가 있는 시간, 그 는 무인도(無人島) 한복판으로 바람 부는 대로 걸어나갔 다. 그리고 우뚝 서서 그를 인간이게 하는 겉껍질을 깎는 다, 깎을수록 투명한 하나의 돛이 될 때까지.

 

신대철 시집<무인도를 위하여> 문학과지성사. 1977

 

 


 

 

신대철 시인 / 그대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

- 백야 1

 

 

합대나무골 산비탈에 불을 질러 밭 일구고 길 내고 하늘 내고 그 길에서 그 하늘에 이름없는 별자리 만들어 가슴에 새기고 별빛을 찾아 메아리 잦아드는 골을 드나 들었다. 밤안이, 음달뜸, 점심골, 시우정골, 그 사이 접경은 잡풀과 사람이 뒤엉켜 살고 있었고 어둠 속에 반짝이는 것은 날수록 더 낮게 나는 반닷불뿐, 그 불빛으로 나무와사람과새를 한 덩어리로 읽고 그 불빛으로 시와 시인의 거리를 비춰보고 나를 거부하고

그 불빛 놓치자

북극권 접어드는 동안

내 별자리는 북극성과 북두칠성을 향해 사라진다.

길 없는 길에는 백야,

 

 


 

 

신대철 시인 / 무인도

 

 

수평선이 축 늘어지게 몰려 앉은 바닷새가 떼를 풀어 흐린 하늘로 날아오른다. 발 헛디딘 새는 발을 잃고, 다시 허공에 떠도는 바닷새, 영원히 앉을 자리를 만들어 허공에 수평선을 이루는 바닷새.

인간을 만나고 온 바다,

물거품 버릴 데를 찾아 무인도로 가고 있다.

 

 


 

 

신대철 시인 / 가금리에서 1

 

 

김포평야,

나지막한 연봉이 뭉게구름 속에 비쳐 올라오는 지평선 그 아래

노부부가 기운 집 하나 빌려 살고 있습니다.

자손을 다 버리고,  

고향에서 잔잔히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에

빨래를 널고 명아주풀을 말리고 애호박 넝쿨을 얹고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하늘빛  

연봉도 뭉게구름도 아득히 창호에 바르고 살아갑니다.  

한강 임진강 물소리가  

노부부의 일생을 휘돌아 이름을 비우고  

마침내 바다로 흘러갑니다.  

 

*가금리는 김포평야 끝 민통선에 걸쳐 있는 마을.

 

 


 

 

신대철 시인 / 알스트로메리아 *

- 무슨 꽃 2

 

 

바람 그치지 않고 그날이 그날인 날, 우린 무슨 꽃을 사이에 두고 그냥 서 있었습니다, 길은 꽃대를 감아 올라 저 혼자 하얗게 피어 있다 떨어지고 함께 있으면 별 뜨던 언덕들 어느새 높아질 대로 높아져 고개로 걸려 있었습니다, 우릴 사이에 두고

 

무슨 꽃  

봉오리째 이울고 얼음 얼고  

바람 그치지 않고 다시 봄 오고  

무슨 꽃  

우리 생각 더듬어 움트는군요, 빗방울잎 기울여 알스트로메리아*를 향해 뻗어 오르는군요. 다가갈수록 산빛으로 바뀌는 머나먼 향기, 나는 가만히 서 있어도 안데스산맥 구름 밑을 떠돕니다, 그대는 잉카인 심장 같은 꽃뿌리에 뿌리를 대고 본향 가까이 살아왔군요,

우릴 사이에 두고  

무슨 꽃 번져가고  

우리 중 누구든  

본향에서 멀어지고 아득해지면  

불쑥 피어 나는 꽃, 알스트로 메리아  

 

*알스트로메리아- 안데스산맥에 자라는 꽃. 진달래나 철쭉과 비슷한 꽃인데 잉카의 꽃이라고도 한다. 꽃말은 본향에의 그리움, 순수한 사랑, 우정 등이라 한다.

 

 


 

 

신대철 시인 / 모퉁이 길

 

 

짐 보퉁이 안고 완행버스에서 누가 내린다

능선길 타고 조르르 내려가다   

산허리를 끼고 돈다 동네 끝집에 들어서서 담벼락 받친 채   

마당 환하게 밝히는 복사꽃 보고 잠시 망설인다   

굴러다니는 신발 하나씩 짝 맞춰 무너진 토방에 올려 놓고   

꽃잎 흩날리는 곳에서 미로에 빠진다   

털부숭이 개가 지나가다 꽃잎 쌓이는 모퉁이에 뒷다리 올려   

얼룩지도를 그린

 

 


 

 

신대철 시인 / 바이칼 소년

 

 

자작나무 숲속에 햇빛이 들어온다.   

나무와 나무 사이 여백이 밝아진다.   

바이칼 소년이 빛을 등지고 웃고 있다. 엊저녁 꺼져가는 난로속에 통나무를 세우고 매운 연기 속에 후우우 바람을 불어넣던

소년, 불 피운 뒤에도 밤늦도록 불 가에 앉아 가슴 깊이 불기운을 들이마시던 소년,

(호수 건너 너나먼 곳을 꿈꾸다 엊그제 오물 *잡으러 간 아버지의 무사귀환을 빌었을까?)

소년이 나가자 천장 높아지고 누우면 옛집처럼 한없이 방바닥이 내려앉았다. 떠돌이들이 구멍 뚫린 창문에 슬며시 남기고 가던, 저 떨리는 목소리 같은 흰 별빛, 바람 속의 바람소리, 그 옛날 산소년들은 한밤에 떠돌이들을 찾아 얼마나 눈 속을 헤맸던가. 흩어진 산길을 한 줄로 몰아 마을 쪽으로 돌려놓고 가슴속의 풀과 나무와 짐승의 이름을 아무도 모르게 사람이름으로 바꿔놓고 그 이름 지워질 때까지 다시 돌아오지 않던 그리운 이웃들, 바이칼 소년은 웃다 말고 나무와 나무 사이 여백에 박혀 있고 나는 그 떠돌이 이웃들처럼 자리를 뜬다. 번쩍 소년이 내 몸 속으로 들어왔다 나간다. 바이칼, 바이칼,

소년이 들어왔다 나간 몸 속에 은빛 푸른 영혼이 돈다,

내가 지상에 오기 전에 핏속에서 오래 기억하고 그리워한

 

*바이칼 호수에 사는 청어 같은 물고기

 

 


 

 

신대철 시인 / 물방울

 

 

물방울이  

풀잎에 매달려 있다  

초원을 배경으로  

몰래 잎 사이를 비춘다  

우박 녹은 자리에  

연둣빛 스치고  

별꽃 아롱거리고  

찰칵  

풀벌레들 잎 뒤로 올라오다  

물방울을 툭 떨어뜨린다  

 

시집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

 

 


 

 

신대철 시인 / 압록강

제1회 혜산 박두진 문학상 수상작 대표시

 

 

전신주 박혀 있던 태왕릉*

호석** 흩어지고 봉분 패이고

뻥대쑥이 흔들린다. 능 너머로 도굴된 능 너머로 조선족들 밀려간다. 장정들 큰 도시로 떠나가고 퉁거우 평원 빈 자리에 옥수수들 웃자란다. 바람받이 길목에 햇볕만 지글거린다. 평상에 앉아 있던 노인들 장기판 들고 나무 아래로 들어간다. 졸 가고 말 가던 땅에 판 바뀌어 동네 혼령들 드나든다. 독립군이 혼강으로 통화현으로 무기 나르던 시절 혼령들이 길을 안내했단다. 훈수 두던 아낙 슬며시 울안으로 들어가고 어디선가 덜그덕 장독 뚜껑 여닫는 소리, 봉숭아 물들인 소녀들 옥수숫대에 붙어 서서 살랑거린다. 고개 내밀다 눈만 웃는다. 지붕 위로 박넝쿨 호박넝쿨 올라가고 굴렁쇠 굴리고 간 아이들 갈 곳 잃고 녹슨 길 감아 돌아온다. 여산인지 용산인지 뻐꾸기 운다. 먼먼 울음 소리에 흐른 강물 따라와 흐른다.

한밤에 가족 이끌고  

옛 땅 숨어들었다가  

전답 붙일 새 없이  

쫓기고 굶주렸던 농민들  

지지난 밤 빗속에  

강을 건너온 탈북자들은?  

뻐꾸기 울음 그쳐도  

강물이 흐른다.  

흐른 강물 다 거느리고  

압록강이 흐른다.  

 

 


 

신대철 시인

1945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 연세대 국문과와 同 대학원 졸업. 196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降雪의 아침에서 解氷의 저녁까지〉가 당선되어 시단에 데뷔. 시집으로 『무인도를 위하여』『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 』『자이칼 키스』가 있다. 제1회 박두진문학상 수상. 제4회 백석문학상 수상. 현재 국민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