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나희덕 시인 / 사라진 손바닥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8.

나희덕 시인 / 사라진 손바닥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창(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2004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2』

 

 


 

 

나희덕 시인 / 부패의 힘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안심한다

녹슬 수 있음에 대하여

 

냄비 속에서 금세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음식에

나는 안심한다

썩을 수 있음에 대하여

 

썩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그러나 잠시도 녹슬지 못하고

제대로 썩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는 나여

가장 안심이 안 되는 나여

 

- 시집 <그곳이 멀지않다>(민음사,1997)

 

 


 

 

나희덕 시인 / 산속에서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

누구나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속에서 밤을 맞아본 사람은 알리라

그 산에 갇힌 작은 지붕들이

거대한 산줄기보다

얼마나 큰 힘으로 어깨를 감싸주는지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비, 1994

 

 


 

나희덕 시인

1966년 충남 논산시 출생. 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그녀에게』, 『파일명 서정시』등과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 접시의 시』 등과 산문집 『반통의 물』, 『저 불빛들을 기억해』,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가 있음.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현대문학상. 제21회 백석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