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영 시인 / 자정의 언어
밤의 꼭지점에 도달한 까마귀는
새하얀 언어로 소곤거려요 당신을 사랑해 내 고백을 받아줄래
우린 사랑을 안 믿는 연인 까마귀는 어둠 속에서 눈동자로 말을 걸지
그래도 당신을 잊을 수 없어
우린 망각에 익숙한 관계 상처가 기입된 기억은 전두엽에 저장된 것일까
난 당신을 영원히 모를 거예요
환영처럼 스쳐가는 것인데 가끔 까마귀는 심장이 아파요
한밤중에 몰래 잠든 당신을 바라보면 안쓰러워요
사랑받지 못하는 아기처럼 늙어가는 소년을 만나지요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줄까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분노로 대답하는 당신
괜찮아요, 시간의 경계가 지나면 창문에 빛이 다가올 거예요 다정하게 건네는 미소처럼
계간 『시와 사상』 2021년 여름호 발표
김혜영 시인 / 동판화를 새기는 변월룡의 독백
조각칼이 지나간 자리마다 울음 우는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식민지 조선을 떠난 할아버지는 시베리아 벌판을 누비는 호랑이 사냥꾼이 되었다. 나는 호랑이 가죽을 입고 동판화 초안을 그린다. 조각칼로 6.25 전쟁 때 총 맞은 아이를 안은 여인의 흐느끼는 등을 새긴다. 동판의 오목한 홈에 붓으로 질산을 바른다. 파인 선을 따라 부식된 먹빛 울음은,
눈보라에 묻혀 아무 소리가 없다 레닌이 방문한 러시아의 시골 동네에서 군중은 수군거렸다. 감자로 끼니를 때운 농부들의 눈동자는 지상에 내려온 별을 만난 듯 반짝였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붉은 깃발이 펄럭거렸다. 국가도 이데올로기도 무의미했던 걸까.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눈 내린 자작나무 숲으로 사냥을 떠났다.
빛과 어둠이 번지는 렘브란트 그림 안으로 들어간다. 투명한 날개가 돋아난다. 날카로운 송곳으로 내 마음 속 깊은 슬픔을 동판에 새긴다. 시베리아 들판에 눈이 내린다. 가난한 포르투갈 아낙네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칼바람에 처연히 흩날린다.
옷이 남루한 포르투갈 여인은 귀족집의 세탁물을 가득 담은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걸어간다 유럽의 서쪽 땅 끝인 까보다로까에는 서풍이 휘몰아쳤지 열일곱 살 소녀의 치마가 펄럭거렸지
디아스포라, 연해주의 차가운 언덕에 앉아 나는 울었다. 난 북한에서 추방되었다. 경계에 선 나무들은 표정이 굳어버렸다. 뿌리가 없는 회색 그림자가 지나갔다. 평양 미술대학에서 보낸 시간은 고작 1년 3개월이었다. 난 귀화를 거부했고 숙청되었다.
푸시킨 동상 제막식을 스케치한다. 푸시킨도 마지막 결투를 할 때 나처럼 외로웠을까. 이곳저곳을 떠도는 유랑의 족속, 이식된 나무의 눈동자는 파란색이었다가 때로는 우수에 잠긴 갈색이었다. 난 주변부를 떠도는 바람의 후예이지요.
연해주 바다는 독재자 스탈린의 싸늘한 눈빛처럼 차갑다. 호랑이 가죽을 입고 인물을 스케치한다. 동판화의 검고 날카로운 선에서 눈 폭풍이 불어온다. 눈 내린 시베리아 벌판을 홀로 유랑하는 호랑이 사냥꾼처럼.
계간『시사사』 2021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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