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경효 시인 / 적소에 들다
오랫동안 내 안에서 떠돌던 것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득한 언어의 그림자
나무 한 그루가 한 나라와 같다면 수많은 나무가 뿌리내린 세상은 얼마나 견고한 요새인가
대숲에 가서 보았다 침묵과 절정 사이에 수직으로 내리꽂힌 수천수만의 칼
저 곧고 푸른 것이 정신이라니 잘 벼린 문장 하나 붙잡고 가슴을 스윽 베이고 싶다 피 흐르는, 내 몸이 꽃으로 피는 독 毒 천 년 후에도
곽경효 시인 / 너라는 이름은
당신 앞에 너라는 이름으로 서기 위해 나는 불면의 밤으로 숙성되어 왔다
매일매일 잠깐씩 당신을 생각했고 그리고 어김없이 저녁이 찾아왔다 당신을 너라고 부를 수 없는 밤에 내 몸에는 가시가 돋았다 당신이 가시에 찔리는 불온한 상상을 했고 잊고 싶은 기억과 잊을 수 없는 기억 사이에서 갈팡질팡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불면의 밤을 견디는 동안 어느 사이 당신의 이름은 맹목(盲目)이 되었다 나는 다시 너에게로 출렁인다
생각해보니 너는 나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곽경효 시인 / 모래바람
오랫동안 모래바람이 불어왔다
내 몸을 뚫고 지나간 바람은 한 번도 제 몸을 보여 준 적이 없다 맨땅에 수많은 실금을 그어놓았을 뿐 물 위에 발자국 위에
어둠의 통점을 가지고 있는 나무는 썩지 않는 뿌리를 가졌다 꽃 피우지 못해 새 한 마리 깃들지 않는다 해도 잎사귀 뒤에 또 한 잎 제 상처를 놓아두고
들리는가 슬픔의 밑바닥에서 하늘을 향해 말을 걸고 있는
곽경효 시인 / 소통
대합탕을 끓인다 날선 칼을 들이대도 꿈쩍 않던 몸이 한순간 허욕의 불길 앞에 쩍- 제 속을 다 보여준다 단숨에 풀어버리는 몸의 결박 소통이란 저토록 쉬운 것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고 세상을 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몸에 집착했으므로 어느 것에도 가까이 가지 못했다 차라리 거짓말 같은 희망을 쾅쾅 내리쳐 부수고 싶었을 뿐 모래알처럼 바스락거리는 불면의 밤이 몇 번 또 슬픔에 매달려 한나절
어느 사이 사막의 바람처럼 더운 체온이 나를 훑고 지나간다 갇혀 있던 말들을 하나씩 꺼내서 허공에 날려 보낸다
한 조각의 뼈도 남지 않은 내 속살
곽경효 시인 / 아집을 깨물다
호두를 깨트려보니 통통한 벌레 한 마리가 고개를 내민다 견고하다고 믿어온 세상에도 빈틈이 있었으니
내 욕망은 빈 배와 같아서 껍데기를 뚫고 들어 온 네가 내 속살을 갉아 먹는 동안 자주 덜거덕거렸다
단단하지 못했던 날들이다 눈 앞의 풍경에다 빗장을 걸고 있었다 누군가가 내 안에 또 다른 세계를 슬어놓은 줄도 모른 채
신념이라는 것 부르지 않아도 온다
말없이 고요한 순간에 불현듯 뒷덜미를 낚아채듯이
곽경효 시인 / 자작나무, 흰 뼈로 서다
그 숲에 들어서니 나무들 일제히 등불을 켠다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온몸으로 불을 밝히고 있다
침묵으로 견뎌온 시간의 눈금이 저리 곧은가
세상의 꽃들이 꿈처럼 피었다 지고 바람은 소리 없이 밀려왔다 또 밀려간다 깃발처럼 흔들리는 이파리는 곧 지워지고 말 생의 한 부분일 뿐
나무에 새겨진 무늬를 바라본다 환하게 꽃피는 생애 가지지 못했으나 꺾이지 않는 한 줄기 등뼈를 지녔으니
마음을 함부로 내보이지 않으려 제 몸의 서슬로 하얗게 빛나고 있는 마른 네 뼈마디,
적막한 자리에서 홀로 깊어지는 사랑아
곽경효 시인 / 존재의 이유
아무 것도 의심하지 않았다
차마 나를 버릴 수 없어 마음을 버렸다
당신, 어느새 내 심장을 쏘았는가 화살처럼 가슴에 박혀 바르르 떨고 있는 날카로운 기억들 바람이 불 때마다 온몸으로 통증이 번져간다
의심했어야 했다 마음의 행방을 물었어야 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천 년 동안의 내 기다림
곽경효 시인 / 중독
말 보다 먼저 목이 메일 때가 있다
지독한 마음을 버리기 위해서 이별을 하는 것이라고 그 사람이 돌아서 간다 절정의 순간, 놓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던가 하지만 순간이라는 말 너무 아파서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막무가내의 슬픔이다 내 이별에는 눈물이 없다 젖었다가 이내 마르는 가벼운 몸을 가졌을 뿐 이제 난 네 몸짓에 간섭하지 않는다 가슴팍을 꽉 깨물고 놓지 않는 말의 턱뼈 그것이 너의 이름이다 차마 버릴 수 없는 오래된 습관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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