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철 시인 / 바람불이 1
떨어지는 빙폭 속에서 설렐수록 푸르러지는 물방울 한잎 받아 흐르고 싶을 때까지 흐르는 물길 끼고 가다 바람불이로 불려가고 싶다 풀씨 쓸려도 흔들리고 새 날려도 흔들리고 그대 없어도 그대 향해 흔들리는 그곳으로
신대철 시인 / 나는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네
평지 끝에서 산속으로 쫓겨 들어온 그해 겨울, 물소리도 끊긴 옻샘에서 얼음 숨구멍을 쪼던 까만 물까마귀와 마주쳤네. 물까마귀는 나를 깊이 쳐다보았고 나는 한눈 팔며 주춤거렸네. 더 쫓길 데 없어 아주 몸 속으로 기어들고 싶었네. 몸 속, 기어들면 영혼이 비치지 않는 곳 에서 살고 싶었네. 겨울 가고 겨울 바위틈에 물까마귀 언 발자국만 남기고 사람도 산도 잊고 한데에서 나는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네. 풀숲에서 날아온 여치와 눈이 마주쳐 쩔쩔맨 적이 있다. 무슨 말이 통해야지…. 그 순간 우 주는 깊고 인간의 말이란 하찮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물까마귀와 눈이 마주쳤으니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세상엔 그렇게 결정적인 만남이 있다. 그 때마다 우리는 욕망과 꿈이 하찮고 허망한 것임을 알게 된다. 도처에 거울이나 우리는 그 거울을 외면하고 사는 것.
신대철 시인 / 자작나무
돌덩이들 은은해지는 폭설 속에서 자작나무를 흔드는 바람과 눈사진 몇 장 찍고 우리는 자작나무 주위를 빙빙 돌았습니다 발자욱 흐른 길에 눈꽃 피었다 지고 흔들린 품속에 손때 묻은 가슴 한 장만 남았습니다 하얀 자작나무 껍질 같은
신대철 시인 / 추운 산
춥다. 눈사람이 되려면 얼마나 걸어야 할까? 잡념과 머리카락이 희어지도록 걷고 밤의 끝에서 또 얼마를 걸어야 될까? 너무 넓은 밤, 사람들은 밤보다 더 넓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즐거워하는 사람들 이름을 붙여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들 이름으로 말하고 이름으로 듣는 사람들 이름을 두세 개씩 갖고 이름에 매여 사는 사람들 깊은 산에 가고 싶다 사람들은 산을 다 어디에 두고 다닐까? 혹은 산을 깎아 대체 무엇을 메웠을까? 생각을 돌리자, 눈발이 날린다. 눈꽃, 은방울꽃, 안개꽃, 메밀꽃, 배꽃 찔레꽃, 박꽃 나는 하루를 하루종일 돌았어도 분침 하나 약자의 침묵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들어가자, 추위 속으로. 때까치, 바람새, 까투리, 오소리, 너구리, 도토리, 다람쥐, 물
신대철 시인 / 강물이 될 때까지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흐린 강물이 흐른다면 흐린 강물이 되어 건너야 하리 디딤돌을 놓고 건너려거든 뒤를 돌아보지 말 일이다 디딤돌은 온데간데 없고 바라볼수록 강폭은 넓어진다 우리가 우리의 땅을 벗어날 수 없고 흐린 강물이 될 수 없다면 우리가 만난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아니고 디딤돌이다
신대철 시집『무인도를 위하여』에서, 문학과지성사
신대철 시인 / 협곡 1
1 협곡에 들어왔습니다, 해는 평야 끝으로 내려와 있더군요, 은빛 바퀴살을 굴러 먹구름 속으로 들어가는군요, 해와 나란히 물 흐르고 바람 흐르고 새 흐르고 나는 조금씩 길을 바꿔 당신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당신이 보이지 않지만 누가 오는군요, 당신 몸속에 꽉 차오른 메아리에 실려 당신에게서 당신이 모르는 누가 오고 있습니다, 나를 그냥 지나쳐 가는군요
2 봄 오기 전 여름 보내고 가을 오기 전 벼랑굴에 들어앉은 당신, 하얀 폭포 몇자락 떨어뜨려 벼랑 높이 재보고 굴 속에 굴을 뜷고 들어가 있군요, 협곡 덮어씌운 물안개 밑으로 물소리만 남기는군요, 나는 아직도 무수한 당신 사이를 지나고 있습니다, 저 물소리 당신의 메아리로 들리면 메아리 울리는 동안 천천히 뒤돌아보며 협곡을 빠져나가고 싶습니다
신대철 시집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 창비
신대철 시인 / 교외에서
..풀꽃들 이름을 하나씩 잊어가고 있다는 사실, 초가 지붕 밑에서 전봇대로 참새가 집을 옮겼다는 사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수 있는 교외에서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수 있는 기쁨과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필요가 없는 기쁨, 이 두 선로 위를 달렸습니다. 내가 쉬는 곳은 쉬는 곳이 간이역입니다. 역에서 내린 쇠스랑꽃 오랑캐꽃은 겨드랑이의 솜털이 보일 만큼 팔뚝을 높이 쳐들고 흔들어댔습니다. 쑥쑥쑥 빠지면서 날리는 팔뚝, 들은 온통 태어나서 두세 번쯤 날아 보는 나비떼 천지였습니다. 산이 내리고, 산이 내린 자리엔 빈 좌석이 앉았습니다. 들 끝은 사방을 둘러봐도 차단기 하나 없는 어둠 속이었습니다. 어둠 속에 흐르는 아크릴 간판 불빛을 이리저리 피하려다 사람과 부딪히고 질서에 부딪혔습니다.
신대철 詩集(문학과지성사ㆍ7).『 무인도를 위하여 』중에서
신대철 시인 / 협곡 2
다시 협곡에 들어왔습니다. 물안개 걷히고 당신이 살던 굴 속은 무너졌군요. 잡풀 쓰러진 굴 입구 쪽으로 단풍나무와 떡갈나무 뿌리들이 뒤엉킨 채 암벽을 뚫고 있습니다. 당신은 죽어서도 평야로 올라오지 못했지만 기러기떼는 논다랑이에 돌아와 있군요. 베어진 벼 밑동에는 새싹 올라오고 이삭이 패고 있습니다. 쭉정이만 남겨도 살아 있는 것은 사력을 다해 올라오는군요. 그때처럼요. 내 몸속에 떠도는 혼을 날아가는 기러기떼 울음소리에 풀어놓고 나는 온 길 잊어버리고 나도 모르는 길로 돌아갑니다.
신대철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 창비
신대철 시인 / 누가 살고 있다
북한산은 올라갈 대로 올라가 다른 산을 향해 봉우리를 내밀고, 지붕 위에서 거리로 쏟아지는 연둣빛 햇살 누가 살고 있다 지도 위의 온갖 지명을 지나 새나 드나드는 비탈에 밭을 붙이고 물소리에 눈 트이며 누가 살고 있다 사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는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잡목숲을 주위에 뭉쳐놓고 사람의 피가 도는 제 숨결을 무서워하며 귀기울이고 있다 번지는 풋풋한 사람 냄새
신대철 시인 / 저녁눈
눈보라에 밀려 동네 허공에 머물던 들새들 눈 덮이는 들판을 향해 구부러진 나무 꼭대기에 나란히 앉는다 그 나무 밑에 나도 나란히 앉는다 어깨에 쌓인 눈이 훈훈히 젖어든다
신대철 시인 / 지평선 마을 3
어디 계세요, 할머니 이웃 토박이들 한데 모여 모판 앉히고 햇살 뿌리고 논물에 가슴 댈 새 없이 황사 몰려오는 평야 저 끝에선 코쟁이들이 이라크를 침공했습니다. 코쟁이들 믿지 마라 하시던 할머니, 모래폭풍 속에서 양떼 따라가다 티 없이 웃던 아이들 팔다리 잘려나가고 울부짖던 부모들 폭격 맞아 죽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TV 화면엔 젖먹이와 그 어미가 나란히 관 속에 누워 있습니다. 그 여름 동틀 무렵 냇물 건너 앞산 토굴에서 애 젖 물린 채 죽어가던 피난민 새댁 기억 나시죠? 할머니께서 따발총 소리 뚫고 참나무댕이에서 주먹밥을 얻어오셨을 때 새댁은 이미 저승으로 떠난 뒤였고 애 울 때마다 모두들 어둠속에서 버짐 낀 얼굴 더듬으며 신음소리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 애 죽은 후 살육과 죽음의 그림자에 휩싸이던 토굴, 저는 아직도 길 가다 토굴에 끌려갔다 나옵니다. 전쟁 끝나기 전에 사방에서 꽃이 피고 있습니다. 화장품 냄새 난다고 머릴 흔드시던 라일락도 피고 있습니다. 요즘엔 라일락에서 머릿속 쑤시는 화약내가 납니다. 멀리 돌아가도 화약내가 따라옵니다. 꽃도 무섭습니다. 할머니, 그 애 그 새댁 눈 감겨준 손길로 이라크 영혼들을 재워주세요. 생전의 말씀대로 저도 죽은 영혼들과 함께 있겠습니다. 오세요, 할머니, 그 때 그 피 묻은 백기는 놓아두시고
신대철 시인 / 곰배령 넘어 ―무슨 꽃1
급류 쏠리는 길가 속새에 물방울에 숨은 눈빛 황홀히 받아 풀섶 반짝이며 흐르던 꽃 희미하게 갈라진 길 앞에서 그대 한눈팔다 들어간 길 한참 되돌려 나올 때 그대의 숨은 눈빛 끌어내어 빛만 남기고 사라지던 꽃 마타리,어수리,궁궁이 그 뒤쪽 어딘가 자취없이 흔들리던 꽃 그 꽃에 홀려 나는 곰배령 넘어 그대에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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