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영애 시인 / 자정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9.

김영애 시인 / 자정

 

 

사전처럼 고요했다 비가 다녀가고

강을 떠도는 망각

 

틈은 작아지고 실패의 구멍은 커졌다

젖은 발자국들, 나는 흐림이다

링거를 꽂는다

비는 계속 자랐다

 

벽은 자라서 비가 되었다는 말

굳었다 흐르다 멈추는

안과 밖의 차이,

 

갈피를 젖게 하는

한 잎의 재가 되는

갠지스 강가 시간들,

 

기울이지 않으면 살아있는지 모를 노란 피

나를 벗어나고 싶었다

 

어디서나 흐르는 우리의 방식

네 소리만 자정에 없다

소리를 흔들었다 강물도 어둠도 아니다

 

바람이 넘어 진다

너의 발목을 휘감고 있는 봄여름가을겨울

샴처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여름 나눠가지고

다른 방향으로 뻗어가는 우리의 알고리즘

 

어둠이 몸에 닿았을 때

어둠이 열린다

자정이 컹컹거린다

 

그것이 우리가 죽어가는 방식

 

몸으로 흐르는 홀로그램

노란 피 속 자정이 붉다

 

계간 『시와 사상』 2021년 여름호 발표

 

 


 

 

김영애 시인 / 레드

 

 

천 년의 물음표가 목젖에서 흔들린다

물음표를 찢고 들어가 종種들의 안부를 건네고 싶은

일초 동안,

 

다른 피의 서사를 기억해낸다

기원을 유영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버텨왔다

그리고 책을 읽었다

 

주방으로 들어가 샐러드를 준비하다 습관처럼 해변의

허리를 따라 걸었다 오래 머물던 마음의 빈자리가 피의 자매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래엔 비밀이 알맞게 자라고 등 뒤엔 방향 잃은

실루엣이 창백하다

피의 발바닥은 어디서부터 뒤집혀졌을까

각본도 없는 피의 서사 뿌리 내린다 피의 볼이 노랗다

 

궤도를 이탈한 덧니처럼

미완의 비밀과 고백이 발등 위에서 반짝인다

 

피는 얼마에 팔아요?

피 속엔 사람이 살지 않았다

피는 묽었다 한때의 습지 같은 문장이 새로 돋는다

노란 피는 어디서 팔아요?

 

물음표, 느낌표, 쉼표, 마침표들 페이지마다 꽂아두었다

 

그땐 왜 다정했는지

각본을 토해내며

종種들의 치맛자락을 찢었다

자세를 구부리는 피의 발목으로 종들이 지나갔다

다시 책을 읽는다

 

계간 『사이펀』 2020년 가을호 발표

 

 


 

김영애 시인

2019년 계간 《시와 사상》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