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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진혜진 시인 / 빗방울 랩소디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9.

진혜진 시인 / 빗방울 랩소디

 

 

우산이 감옥이 될 때

 

예고 없이 소나기가 쏟아진다 손잡이는 피하지 못할 것에 잡혀 있다

비를 펼치면 우산이 되고 우산을 펼치면 감옥

 

수감된 몸에서 목걸이 발찌는 창살 소리를 낸다

소나기 속의 소나기로 나는 흠뻑 젖는다

 

보도블록 위의 빗방울

절반은 나의 울음으로 남고 절반은 땅의 심장에 커다란 구멍을 낼 것이다

 

버스정류장 앞 웅덩이가

막차를 기다리는 새벽 2시의 속수무책과 만나 서로의 발목을 잡는다

 

빗방울 여러분!

심장이 없고 웃기만 하는 물의 가면을 벗기시겠습니까

젖어서 만신창이가 된 표정을 바라만 보고 있겠습니까

 

어떤 상실은 끝보다 시작이 더 아파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 끝이 날까

 

두 줄을 긋듯 질주하는 차가 나를 후경에 밀치고

검은 우산과 정차 없는 바퀴와 폭우가 만들어내는 피날레

 

젖어서 죄가 되는 빗방울

기도가 잠겨 있는 빗방울

 

우산은 비를 따라 용서 바깥으로 떠난다

 

시집『포도에서 만납시다』 2021년

 

 


 

 

진혜진 시인 / 앙상블

 

 

내리는 비는 여럿입니다

둥근 입술에 앉은 둥근 시간

테이블 위에서 당신 없는 하루가 발간됩니다

 

우리는 마카롱을 먹을 수 없습니다

격식 있는 루머는 실제보다 우아하게

가끔씩 깃털로 내려앉습니다

 

달달하게 시간을 넘겨볼까요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검은 입술이 되어 볼까요

사실과 사정

사물과 사람

소문으로 구성된 노천카페에서 없는 당신은 없는 분위기일까요

 

이 비는 반성입니까

반목입니까 반복입니까

젖은 소문이 주르르 흐릅니다

 

분홍에서 하양으로 가는 꽃말은 싱싱함을 끝까지 사랑할 줄 압니다

코러스를 완성하려면 없는 입술이 필요합니다

 

내 앞엔 달달해서 딱 씹기 좋은

추문의 배후가 있고

 

젖은 새는 쫓아내도

집요하게 누군가를 향해 날아옵니다

 

동고비,

하고 입을 모으면

새는 발자국 활자로 앉습니다

 

시집『포도에서 만납시다』 2021년

 

 


 

 

진혜진 시인 / B203에는 장수하늘소가 산다

 

 

장수하늘소는 구름입니다 뒷모습엔 장수가 없고 하늘이 없고 코뿔소가 없어 그냥 지금입니다 언제부터 그늘 밖을 겉돌았는지 시장 모퉁이를 돌면 좌판에서도 꽃피는 대파와 두부를 담은 검은 봉지입니다

 

  장수하늘소는 날개 꺾인 부엉이인지 물 위의 청둥오리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름만 장수인 장수하늘소는 누군가가 떡갈나무를 침범하고 누군가가 산허리를 치받아도 묵묵히 이름에만 머뭅니다

 

   손에 든 대파 한 단 속으로 동그라미가 들어옵니다 파는 사라져도 동그라미를 장수하늘소가 꽉 붙잡고 있을지 모릅니다 주변엔 오답이 널려 있습니다 허무만 장수합니다 B203호에 연필심만 뿔이 되어 그를 들이받고 있습니다

 

시집『포도에서 만납시다』 2021년

 

 


 

 

진혜진 시인 / 통화음이 길어질 때

 

 

포도에서 만납시다

머리와 어깨를 맞댄

돌담을 돌면 포도밭이 있다

우리의 간격은 포도송이로 옮겨가고

담장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처럼

지지대를 타고 몸을 쌓는다

씨를 품는다

우리는 서로 기댄 채 손끝이 뜨거워지고

포도는 오래 매달릴수록 그늘의 맛이 깊어진다

입꼬리 올린 갈림길마다 가위눌린 꿈에서

쓴맛이 돈다

포도는 입맞춤으로 열리고 선택으로 흩어진다

바둑판 위에서 반집을 지키는

흑백의 돌처럼

우리는 내려올 수 없는 온도

피가 둥글어진다

언젠가 통화음이 길어졌을 때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걸 예감했고

덩굴인 엄마가 욱신거려

그해 포도씨는 자꾸만 씹혔다

깨물어 버릴까

한 팔이 눌리고 한 다리가 불면인 잠버릇이 생긴 곳

자유로를 지나 수목장 가는 길

포도 알맹이를 삼킨다

하나의 맛이 두 개의 흔적을 낸다

단단히 쌓은 탑을 나는 한 알 한 알 허물고 있다

 

시집『포도에서 만납시다』 2021년

 

 


 

 

진혜진 시인 / 앵두나무 상영관

 

 

이 도시에 봄이 없다는 걸 알고

사람들이 길목마다 앵두나무를 심었다

 

몇 분 간격으로 터지는 앵두

비와 졸음 사이에 짓무른 앵두

붉은 앵두는 금지된 몸에서 터져 나온다

 

한쪽 눈을 감는 사이

바닥으로 누운 흰 사다리를 건넌다

소나기 그친 사이를 아이가 손을 들고 뛰어간다

할머니는 한 칸 한 칸 신호음 사이를 짚고 넘어간다

 

사람들이 마중과 배웅으로

사다리를 건너면 앵두의 색깔이 바뀐다

 

순식간에 달려간 계절이 다른 계절의 입에 물리듯

빨강을 물고 앵두나무는 발설하지 않은 소문까지 뻗는다

 

앵두가 지면

초록 이파리가 여름 정원에 비비새 울음으로 남아

그 울음 끝에 매달릴 이파리로 남아

세를 불리는 앵두나무

공중으로 발을 들어 올린다

 

신호등이 봄을 켠다

 

짧은 치마를 입은 듯 가벼운 신호음

떠나갈 사람과 돌아올 사람의 안부가 위태로워

맨 처음의 얼굴로

막을 내리지 못하는 봄이 있다

 

시집『포도에서 만납시다』 2021년

 

 


 

 

진혜진 시인 / 얼룩무늬 두루마리

 

 

너는 나로 나는 너로 감겼던 얼굴이 풀립니다 겹은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풀려야 할 것이 풀리지 않습니다 예전의 당신이 아니군요 풀린 것들에서 배웅의 냄새가 납니다 나는 얼굴을 감싸고 화장실을 다녀갑니다

 

내려야 할 물도 우주라 욕조에 몸을 띄웁니다 세면대의 관점에서 얼굴은 흐르는군요 얼룩의 심장이 부풀어 오릅니다 비누거품에서 맹세는 하얗다는 걸 보았습니다

 

이제 거울의 시간입니다 위험을 느끼는 것은 숨의 기억입니다 피를 흘립니다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얼굴에는 새카만 통로가 생겨납니다 너의 손안에 나를 풀어놓고 얼룩을 통과해야 할 때입니다 나는

 

시집 『포도에서 만납시다』(상상인, 2021) 중에서

 

 


 

 

진혜진 시인 / 점토인형

 

 

1

어둠과 빛은 붉은 진흙의 심장을 가졌습니다

흑과 백을 쥔 채 우리는 너무 단단해서 어쩌면 텅 빈 속입니다

 

2

당신은 나를 비 맞은 매화나무로 베어내고 속을 묻습니다 손에 쥐었던 새를 공중에 날리면 젖은 손바닥에서 어둠의 길목들이 생깁니다

 

매일은 빚어집니다 가짜가 진짜로 바뀔 때 비로소 충돌하는 어제가 빚어집니다 이쪽에서 보면 우리는 만나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한 쌍의 인형처럼

 

3

순간이 흙인 사람이 있습니다

순간은 순간을 닮아 태어나므로 잘못이 없을까 한 번 더 만져봅니다

 

모든 끝은 스며들다 사라집니다 한 번도 순간에게 나를 내준 적 없는데 당신과 흑백은 그 이후가 됩니다

 

버려진 흙처럼 세상에 없던 이방인들이 내 안에 군중을 이루고 있습니다 붉은 심장은 만들어지는 것이라서

 

생생하게 부서져야 만날 것입니다

 

시집 『포도에서 만납시다』(상상인, 2021) 중에서

 


 

진혜진 시인

2016년 《경남신문》신춘문예 당선. 2016년 《광주일보》신춘문예 당선. 2016년 계간《시산맥》등단. 시집으로 『포도에서 만납시다』(상상인, 2021)가 있음. 202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제11회 시산맥작품상 수상. 현재 도서출판 상상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