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영 시인 / 넷플릭스
꽃을 꽃으로만 보던 절기가 지났다 계절이 꽃보다 더 선명하게 붉었다 그때 당신은 열리는 시기를 놓치고, 나는 떨어지는 얼굴을 놓쳤다 되돌려볼 수 있는 사랑은 흔한 인형 같아서 멀어진 뒤에는 새로운 채널에 가입해야 했다 언제든 볼 수 있는 당신은 귀하지 않았다 공유했던 두근거림이 채널 뒤의 풍경으로 사라져 갔다 나는 캄캄한 시간을 스크린에 띄우고 당신에 대한 기억을 하나씩 지우기로 했다 사랑을 자막처럼 읽는 시절이 왔다 눈에 잡히지 않은 오래전 사람처럼 자꾸 시간을 겉돌았다 나를 의자에 앉혀두고 당신은 생각에서 벗어난 생각을 보고 있었다 느슨해진 목소리가 사랑을 끝내고 있었다 툭 툭 우리는 같은 의자에서 서로 다른 장면을 몸 밖으로 밀어내는 중이었다
시집.『두 번째 농담』(시산맥, 2021) 중에서
문정영 시인 / 아수라
거위로 다시 왔다 가볍지 않은 흰 날개, 짧고 두꺼운 부리로 울던 나는 세 개의 무서운 얼굴은 가문비 숲에 숨겨 두었고, 여섯 개의 긴 팔은 은사시나무가 되었다 나로 살려 할수록 뒤뚱거렸다
어느 날부터 수면 아래가 안락해졌다 가라앉는 나를 향한 수없는 발짓에 늪에서 피는 꽃은 지고 말았어 누구도 나를 아수라 부르지 않았고 더는 숨을 멈출 수 없을 때 아득히 저무는 꽃 부르르 떨리는 이름으로 태어나 무거운 의문이 날개를 달았을까
내 몸으로는 하루하루를 날아오르지 못했다 뜨거워질 만큼 부풀거나 무거워진 만큼 가라앉아 더는 지상에서 불러낼 이름은 없었다 소리구멍 다 열고 날마다 거위 울음으로 나는 울었다
시집.『두 번째 농담』(시산맥, 202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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