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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경주 시인 /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9.

김경주 시인 /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내 우주에 오면 위험하다

나는 네게 내 빵을 들켰다

 

기껏해야 생은 자기피를 어슬렁거리는 것이다

 

한 겨울 얼어붙은 어미의 젖꼭지를 물고 늘어지며

눈동자에 살이 천천히 오르고 있는 늑대

엄마 왜 우리는 자꾸 이 생에서 희박해져가요

내가 태어날 때 나는 너를 핥아주었단다

사랑하는 그녀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싶어요

네 음모로 네가 죽을 수도 있는 게 삶이란다

눈이 쏟아지면 앞발을 들어

인간의 방문을 수없이 두드리다가

아버지와 나는 같은 곳에 똥을 누게 되었단다

너와 누이들을 이곳에 물어다 나르는데

삼십년 동안 침을 흘렸단다 그 사이

아버지는 인간 곁에 가기 위해 발이 두 개나 잘려나갔다

엄마 내 우주는 끙끙 앓아요

매일 발자국 소리하나 내지 않고

그녀의 창문을 서성거려요

자기 이빨 부딪히는 소리에 잠이 깨는 짐승은

너뿐이 아니란다

 

얘야 네가 다 자라면 나는 네 곁에서 길을 잃고 싶구나

 

엄마 ……

 

시작 <2004년 겨울호>

 

 


 

 

김경주 시인 / 부재중

 

 

  말하자면 귀뚜라미 눈썹만한 비들이 내린다 오래 비워둔 방안에서 혼자 울리는 전화 수신음 같은 것이 지금 내 영혼이다 예컨대 그 소리가 여우비 는개비 내리는 어느 식민지의 추적추적한 처형장에서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 두고, 바닥에 내려놓은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댕강 댕강 목 잘리는 소리인지 죽기 전 하늘을 노려보는 그 흰 눈깔들에 빗물이 번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카자흐스탄에 간 친구가 설원에서 자전거를 배우다가 무릎팍이 깨져 울면서 내게 1541을 연방연방 보내는 소리인지 아무튼 나 없는 방안에서 나오는 그  소리가 지금 내 영혼이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그대라는 봄을 타는지도 모르겠다 비 맞으며  귀신이 자신의 집으로 저벅저벅 문상 간다 생전에 신던 신발을 들고 운다 산에 핀 산꽃이 알토기의 혀 속에서 녹는다 돌 위에 해가 떨어진다 피난민처럼 나는 숨어서만 운다

 

다층 (2005년 여름호)

 

 


 

 

김경주 시인 / 피리

 

 

 모를 심어가듯 구멍마다 숨을 심는다 갈라진 논길을 더듬는 단비같은 입술로 대궁 속, 소리의 가뭄을 교란시킨다 헛김만 가득한 어둠 속에 한 모 한 모 맑은 숨의 뿌리만을 묶어 심고 안창 깊은 곳, 오래 다진 울음들을 퇴비로 깔아준다 소리의 피를 빨던 거머리들이 녹아나기 시작하고 서서히 속내 오므리고 쓰러졌던 모종, 소리의 탯줄들이 풀리는 것이다 더운 바람만 요란했던 내부, 소리의 자궁 어디쯤에서 생쌀만한 슬픔들은 익어 가는 것일까 퍽퍽 뜨거운 눈물을 뱉어내며 태어나는 알몸의 벼들, 바람의 입술을 스치고 고랑 밖으로 쏟아질 때까지 쏟아질 때까지

 

 


 

 

김경주 시인 / 목련(木蓮)

 

 

마루에 누워 자고 일어난다

십 이년동안 자취(自取)했다

 

삶이 영혼의 청중들이라고

생각한 이후

단 한번만 사랑하고자 했으나

이 세상에 그늘로 자취하다가 간 나무와

인연을 맺는 일 또한 습하다

문득 목련은 그때 핀다

 

저 목련의 발가락들이 내 연인(戀人)들을 기웃거렸다

이사 때마다 기차의 화물칸에 실어온 자전거처럼

나는 그 바람에 다시 접근한다

얼마나 많은 거미들이

나무의 성대에서 입을 벌리고 말라가고서야

꽃은 넘어오는 것인가

화상은 외상이 아니라 내상이다

문득 목련은 그때 보인다

 

이빨을 빨갛게 적시던 사랑이여

목련의 그늘이 너무 뜨거워서 우는가

 

나무에 목을 걸고 죽은 꽃을 본다

인질을 놓아주듯이 목련은

꽃잎의 목을 또 조용히 놓아준다

그늘이 비리다

 

웹진 <문장>2006년 5월호

 

 


 

 

김경주 시인 / 바람의 연대기는 누가 다 기록하나

 

 

  1

 

  이를테면 빙하는 제 속에 바람을 얼리고 수세기를 도도히 흐른다

  극점에 도달한 등반가들이 설산의 눈을 주워 먹으며 할말을 한다 몇백 년 동안 녹지 않았던 눈들을 우리는 지금 먹고 있는 거야 얼음의 세계에 갇힌 수세기 전 바람을 먹는 것이지 이 바람에 도달하려고 사람들은 수세기 동안 거룩한 인생에 지각을 하기 위해 산을 떠돌았어 그리고 이따금 거기서 메아리를 날렸지

 

 삶이

      닿지 않는 곳에만

                       가서

                            메아리는

                                     젖는다

 

  메아리는 바람 앞에서 인간이 하는, 유일한 인간의 방식이 아니랄까

  어느 날 거울을 깨자 속에 있던 바람이 푸른 하늘을 향해 만발한다

  그리고 누군가 내 얼굴을 더듬으며 물었다 우선 노래부터 시작하자고.

 

2

 

  바람은 살아 있는 화석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사라진 뒤에도 스스로 살아남아서 떠돈다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 속에서 운다 그러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바람의 세계 속에서 울다 간다

 

바람이 불자

            새들이

                   자신의

                         꿈속으로 날아간다

 

  인간의 눈동자를 가진 새들을 바라보며 자신은 바로 오는 타인의 눈 속을 헤맨다

  그것은 바람의 연대기 앞에서 살다 간 사람들의 희미한 웃음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바람에게 함부로 반말하지 말라는 농담 정도

 

시집 <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2006년 렌덤하우스중앙

 

 


 

 

김경주 시인 / 외계 (外界)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畵家)였다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다

그림이 되지 않으면

절벽으로 기어올라가 그는 몇 달씩 입을 벌렸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色) 하나를 찾기 위해

눈 속 깊은 곳으로 어두운 화산을 내려보내곤 하였다

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시집 <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2006년 렌덤하우스중앙

 

 


 

 

김경주 시인 / 봉인된 선험

 

 

하나의 돌

물속에서 건져올린 하나의 돌

돌 하나에 입혀진 무늬는

물의 환상이 다녀간 시간이다

하나의 돌이 물속에서 건져올려지기 위해선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하나의 꽃

꽃은 나무의 환영이다

나무가 그 환영을 보기 위해선

꽃이 자신의 환영인 나무를 문득 알아볼 때까지이다

서로의 환영을 바라보며 둘은 예감으로 말라간다

 

하나의 무늬

하나의 무늬가 물속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바람의 수런이 필요한가

바람 하나에 입혀진 무늬가

사람의 눈을 들어올리고

바람이 들여다보고 간 시간이 물속에선

누런 그늘이 된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닥에선

잘린 손가락들이 하얗게 잘려가도 있다

 

그리고 하나의 시간

만삭의 물고기들은 물 속에서 어른거리는

환영을 따라 날고 물이 져 나르는

그늘의 부력 안에서

배는 물의 무늬를 받는다

배의 환영을 알아보고 등대는 문득 입김을 불고

바람의 장례를 치르는 관습은 음악이 되었다

행주가 상을 문지르듯 배가 쓰윽

들어오고 있다

하나의 개념이 최초의 시간에 정박한다

 

시집 <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2006년 -랜덤하우스중앙

 

 


 

 

김경주 시인 / 주저흔(躊躇痕)

 

 

몇 세기 전 지층이 발견되었다

 

그는 지층에 묻혀 있던 짐승의 울음소리를 조심히 벗겨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발굴한 화석의 연대기를 물었고 다투어서 생몰연대를 찾았다

그는 다시 몇 세기 전 돌 속으로 스민 빗방울을 조금씩 긁어내면서

자꾸만 캄캄한 동굴 속에서 자신이 흐느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굴 밖에선 횃불이 마구 날아들었고 눈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간을 오래 가진 돌들은 역한 냄새를 풍기는 법인데 그것은 돌 속으로

들어간 몇 세기 전 바람과 빛덩이들이 곤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썩지 못하고 땅이 뒤집어 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동일 시간에 귀속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전이를 일으키기도 한다

화석의 내부에서 빗방울과 햇빛과 바람을 다 빼내면 이 화석은 죽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연구 결과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바람은 죽으려 한 적이 있다>

 

어머니와 나는 같은 피를 나누어 가졌다기보단 어쩐지 똑같은 울음소리를

가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계간 『실천문학』 2006년 가을호 발표

 

 


 

김경주 시인

1976년 전남 광주 출생. 서강대 철학과 졸업 .2003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중앙, 2006)와 『기담』(문학과지성사, 2008) 등이 있고, 그밖의 저서로는 『당신도 카피라이터가 될 수 있다』, 『노빈손의 판타스틱 우주 원정대』등이 있음. 2009년 제28회 김수영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