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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왕노 시인 / 것들의 세상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9.

김왕노 시인 / 것들의 세상

 

 

나는 너무 많은 것들에 싸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 길을 잃은 적이 있다.

하나 것들 하면 나와 사이가 생기고 그 사이로 바람이 불고 아이가 강아지풀

고개 위로 철철철 오줌발을 세우고 백년우물에 별이 떨어지고 아버지가 꿈을 몰아

환히 불 켜진 집으로 돌아오고, 것들과 것들의 사이가 좁혀지면 은밀함이 생기고

다정이 생긴다.

 

세상은 것들의 세상, 하나 네게나 내게 것들이 너무 많아. 나를 거리에서

바람처럼 흔들던 것들, 흔들리다 잃은 균형을 잡을 때 도와준 것들, 네 말일 수 있고

네 손일 수 있고, 네 늦은 노래, 네가 내게 건네준 풀꽃 같은 마음일 수 있고

내가 몇 줄 읽은 책의 내용일 수 있고... 너를 흔들던 것도 많았겠지. 네게 왔다던

지리산 푸른 산 빛도 그렇고 낙태된 네 꿈도 그렇고 너를 흔들던 노을빛도 그렇고

따지면 너를 울리던 것들, 나를 울리던 것들, 멀리로 떠나가던 배, 자욱한

안개정국 같은 어제와 오늘, 이별의 통보도 없이, 잘 있어라 손짓도 없이 느닷없이

부음을 날리는 이름과 모든 것을 초월한 듯 환하게 웃으며 불러 모으는 시인의 영정

사자에게 잡힌 동물의 마지막 버둥거림, 세상은 다 기록하지 못할 것들의 세상

내 가슴을 훈훈하게 했던 것들, 새끼를 줄줄이 매달고 개울을 거슬러 오르던 오리

그해 겨울 출정을 선언할 때 분분이 휘날리던 눈발, 언 땅을 파다보니 얼지 않고

땅에 박혀있던 노가다 현장의 풀뿌리, 반합에 퍼 담자마자 꽁꽁 언 밥을 먹으며

서로 바라보던 전방에서 함께 한 전우의 얼굴, 그때 함께 불렀던 장밋빛 스카프

이념서적을 잃으며 비틀거릴 때마다 누군가 내주던 따뜻한 어깨, 한잔 술을 하며

것들이란 말로 말 잇기 놀이를 해도 좋은 것들의 세상, 세상은 따지면 것들의 세상

어머니 것들도 알아, 물 항라 저고리가 어머니 것, 새벽 부뚜막에 떠놓던 백년

우물에서 길은 정안수도 어머니 것, 자식을 위해 언제나 구근처럼 세상에 묻혀

자식을 생각할 때마다 두근두근 대던 심장을 진정시켰던 어머니 사랑도, 먼 곳에서

삼꽃이 필 때 싹싹 슬던 새벽마당도 어머니 것, 세상 모든 슬픔도 어머니 것

나쁜 것들 앞에 좋은 것이 있고 좋은 것 뒤에 나쁜 것이 있어 파란만장이고

가슴 확 터주는 것이 있으면 막아서는 것이 있어 세상은 뒤죽박죽 아수라장 같으나

살펴보면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의 세상, 누가 키우지 않아도 들판에 자욱한 풀꽃

누가 물길을 터주지 않아도 내 곁으로 흘러가는 개울물, 개울물에 사는 버들치와

피라미와 민물새우와 가시고기 물총새와 소금쟁이 물 매암도 아름다워. 유랑의 피를

자극하며 먼 산을 넘어가는 새하얀 구름도, 보랏빛 오동나무 꽃으로 뚝뚝 져

민무늬 세상을 수놓는 북벌하고 왜를 수장시키라는 할아버지 말씀도, 벼락같은

성질의 아버지를 파묘할 때 한 벌 뼈로 남아있던 서로 사랑하라던 말, 아버지 뼈를

받던 한지와 아버지 뼈를 거두던 버드나무가지와 아버지 진노할까봐 침을 꼴깍

삼키며 바라보던 누이의 작은 어깨와 잠시 울음을 멈춘 물푸레나무 꼭대기의 뻐꾸기

아직도 가난한 골목의 허름한 집에서 새파란 불꽃을 만드는 구공탄과 구공탄을 가는

노인의 단정하게 굽은 허리도 아름다워, 저 물결치는 벼도, 물결을 만드는 선선한 바람도

아름답지 못한 일과 아름답지 못한 것들을 돌보며 사방에선 아름다운 것이 물결을

감동의 물결을 이루며 흘러가, 지나가, 외딴집의 녹슨 안테나를 타고 오르다가

피운 나팔 꽃 같이, 풀 고갱이 같이, 바람에 이는 메밀꽃 같이, 손목 안쪽 같이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나르는 후투티의 날개 같이, 기꺼이 몸을 내줘 후투티 입에

물린 벌레 같이 하여 세상은 살만한 곳. 네 같은 것이, 네 까짓 게 하는 것보다

가난하며 가난하므로 따뜻하게 서로를 부르는 것들의 세상, 나를 불안에 빠뜨리고

나를 울먹이게 하는 것들이 있으나 세상은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것들의 세상

내 사랑이라는 것, 내 그리움이란 것, 꽃 피우려 묻힌 씨앗을 품은 어둠과 파수하는

별과 먼별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로 인해 나의 것도 꽃처럼 피는 것, 나에게

모든 것은 적이 아니라 내 힘이 되어주는 것들이라는 생각, 세상 깊이 들여다보면

세상은 만화경 같은 것들의 세상, 가자, 가자 것들의 세상으로 일 나가듯 발을 탕탕 구르며

신발 끈을 바로 묶고 것들의 편입생인 듯 소지품도 꼼꼼히 챙기고, 세상은, 것들의 세상

상것 아랫것들 없고 격이 없는 동학접주 같은 우리가 기다리며 만들려는 것들의 세상

어쩌면 같잖은 것들의 세상, 것들의 요철로 덜컹거리는 세상, 순기능인 것들, 역기능 것들, 것들이 얽히고설키나 것들의 울력으로 들판에 쥐불연기 피어오르고 재가 된 것은 뿌리로

타지 않는 것은 불의 담금질로 다음해 더 많은 꽃을 피울 수천수만 그루 개 복숭아 같은

그리움이 되고, 속살 같이 파르르 떨며 피어나는 수천수만 송이 그리움도 보고

나는 많은 것들에 둘러싸여 뼛속까지 물든 쓸쓸함을 간신히 지운 적이 있다.

하나 방풍림 같은 것들에 싸여 피곤한 나날 곤한 잠을 잔적도 여러 번 있었다.

 

웹진 『시인광장』 2021년 7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경북 포항에서 출생. 1992년〈매일신문〉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황금을 만드는 임금과 새를 만드는 시인』, 『슬픔도 진화한다』, 『말달리자 아버지』,『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중독-박인환문학상 수상집』『사진속의 바다』, 『그리운 파란만장』,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게릴라』, 『이별 그 후의 날들』, 『리아스식 사랑』,『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등이 있음. 한국해양문학대상, 박인환 문학상, 지리산 문학상, 디카시 작품상, 수원문학대상, 한성기 문학상, 풀꽃 문학상, 2018년 제 11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좋은시상, 시작문학상 등 수상, 2018년 올해의 좋은 시상, 축구단 말발 단장, 한국 디카시 상임이사, 한국시인협회 부회장, 현재 문학잡지《시와 경계》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