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인 시인 / 너와집 한 채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질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 붙은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는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아주 잊었던 연모 머리 위의 별처럼 띄워놓고
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 매봉산 넘어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
―시집『물 건너는 사람』(세계사, 1992)
김명인 시인 / 겨울 오이도
사당역에서 전철로 한 시간, 종점에 내려 시내버스로 갈아타고도 한참을 더 가야 하는 오이도, 죽은 임영조가 타고 내리던 시 속에 섬으로 가둬놓고 끝내 부리지 못했던 종점, 그 「오이도」가 첫눈처럼 귓가에 떠돈다 각자의 세월로 이어지다 가라앉다가 십 수 년 후딱 지나가버린 갯머리에 멈춰 세워 다시 섬으로 만나게 하는 오이도 일찍이 나는 시화호에 매달린 그곳으로 학생들 끌고 유람 간 적 있지 간척지 상가에서 바지락국수를 후룩거리면 물 빠진 개펄로 흐릿하던 건너편 화성, 거긴 로켓으로나 닿을 수 있다고, 그나 나나 시절은 예제로 촌스러운데 그걸 끝내 벗지 못 해서 티 맑은 사람, 사당역에 내리니 무슨 유행병인지 혹한에 승객들 듬성듬성한데 오이도 행 전철에 그가 막 오른다 온통 귀 밝은 웃음으로나 혼자 들뜨려고 겨울조차 따뜻한 오이도, “내 마음 자주 뻗는 외진 성지”둘러보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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