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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대철 시인 / 강가에서 외 1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30.

신대철 시인 / 강가에서

-아이오와 4

 

 

시를 버려도 자작나무에 기대어 강줄기를 읽고 있는 저 사내가 걸어온 옥수수밭 서릿길이 보일까 시를 버려도 넋 놓고 사내를 바라보는 나를 한 줄로 획 지우고 간 비행운을 기억할 수 있을까

사내가 흘러간 강가   

불타오르다 그을린 보트 하나 되돌아와   

자작나무에 기대어 있다

시를 쓸 수 없을 것 같아 괴롭던 저녁을

술로, 보내버리고 일어난 아침.   

누군가에게 선물할 신대철 시집에 글을 남기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를 버려도, 문득 바람에 손 흔드는 잎의 반짝거림을 느낄 수 있을까   

시를 버려도, 외롭다고 자백할 수 없어 긴 길을 헤맬 수 있을까

 

 


 

 

신대철 시인 / 마지막 그 분

 

 

7부 능선에서  

개활지로 강가로 내려오던 밤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앞선 순서대로 이름 떠올리며   

일렬로 숨죽이며 헤쳐가던 길   

그분은 맨 끝에 매달려 왔다   

질퍽거리는 갈대숲에서   

몇 번 수신호를 보내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깜깜한 어둠 속을 한동안 응시하다   

군사분계선을 넘어갔다   

함께 가자 위협하지도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신대철 시인 / 무지개, 무지개, 원무지개

 

 

줄줄이 늘어선 상가 이층 칸막이 한구석에 시계수리점을 낸 할머니, 점포에 마른 몸 붙이고 닳아빠진 분침 하나로 돌아가는 할머니, 남의 시계 미뤄두고 당신 시간 앞에서 자주 돋보기를 벗는다, 눈 몇 번 비비고 다시 남은 시간을 뜯어본다, 소용돌이치는 먼지 바람이 거리를 들쑤시어 행인들을 골목으로 처마 밑으로 밀어넣는 오후 네시, 분침이 시침으로 넘어가는 할머니 옆에서 나는 초침만 남아 있다,

예 온 지 한 삼십 년, 이젠 몽골 사람 다됐지요,

예까지 와서 한 핏줄끼리 남이니 북이니 하면 안 돼요,   

예서는 조선이 남이건 북이건 솔롱고스, 몽골말로 다 무지개 나랍니다,

북쪽에서도 오느냐고 친근하게 던진 인사말에 단숨에 속에 다져둔 말을 풀어놓는 할머니, 젊은 나이에 안동에서 기차를 타고 북으로 올라와 연변으로, 다시 심양으로 흘러들어 정착할 무렵 동반자와 사별하고, 중국에 나와 있던 몽골 남자를 따라 울란 바토로까지 오게 된 할머니, 갈 데 없으면 빈방을 내주겠다고 한다,   

저녁 초대를 받고 해지기 전에 아파트에 들어섰다, 초인종을 길게 눌렀다, 종소리가 안으로 검푸른 심연을 향해 거슬러 올라간다, 숨막히는 심양, 연변, 평양을 거쳐 안동에 이르자 씀바귀 같은, 자운영 같은, 몸에 밴 목소리 흘러나온다, 어서 오세요, 개울물 소리 끊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들뜬 가시내 목소리 거듭 울려나오고, 열린 창으로 바람 불고, 바람 몰래 굴절하는 목 메인 소리에 문득 부황 뜬 피붙이 얼굴 창 너머에 떴다 문드러지고, 숨 돌릴 새 없는 적막, 안동땅에 머물수록 흩어진 피 끓이는 그 적막 속에서 잔잔히 울려오는 갈라질 듯 갈라질 듯한 음색에 실려 나는 무지개 나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할머니를 따라가면 황사 낀 한밤에도   

언제나 바로 눈앞에 뜨는   

돌아갈 수도 비벼댈 언덕도 없는   

무지개, 무지개 나라.   

- 신대철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문학과지성사,2000)에서

 

 


 

 

신대철 시인 / 사람이 그리운 날. 3

 

 

눈 쌓이지 않는 산모퉁일 몇 개 돌아 들면 이름 안 붙여진 계곡에 이름 안 붙여진 산 속이 있고 지리 모르는 길가엔 스스로 묻히려고 산 속에 드는 풀꽃들, 파헤쳐진 애장 몇, 산 속엔 가을에도 인간은 살지 않았구나.

산이 키운 한 인간을 버리고

인간이 키운 한 인간을 버리고

한 인간을 찾아

떠도는 눈, 눈발

 

196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신대철 시인 / 강설의 아침에서 해빙의 저녁까지

 

 

하루는, 늘   

흙속에서 흘속으로 출렁이는 약한 가교.   

눈 가상이에 숨쉬는 세계의 놓은 혈압을   

탄탄한 의욕 펴 가벼이 납득하고서   

불티마저 꺼진 관능의 온돌방을 빠져나올 때   

우리의 안팎으로 섬교하게 이어지는   

뜨겁기만한 잎사귀와 뿌리털.   

오랜만의 초조한 외출길에도   

메마른 폭설은 허기처럼 산발하여 내리고,   

해일위에 뜬 지구의 제 중심을 향해   

우리는 가장 부지런한 자갈길을 걷는다.   

안개 피어오르는 현대와 과거의   

조금씩 부드러워진 여울목을 내려오르다가, 불현듯 우리는 흩어지고   

겨울나무들이 최종의 잎새를 떨듯이   

수심깊은 뿌리털속에서   

나는 첨예한 눈을 뜬다.   

허약자들이 죽어 쌓인 먼지와   

모래알 껴 답답한 나목의 사회.   

어딜까, 햇볕이 아직은 고여있을 토양에 정착하고자   

바람의 캄캄한 틈바귀마다   

내 슬기로운 탐색을 비벼 넣는다.   

가벼운 압력조차 잘 느끼는 촉각을 뻗친다.   

잎사귀와 뿌리털의 신비로운 기능을   

번갈아 나눠하며   

그후,   

평범한 생활인이었던가를   

귀 열어 가다듬은 이웃을위해   

내 의미대로의 대답을 준다.   

시간의 옆에 물러앉아   

흙속으로 전화 거는 눈먼 노인이여,   

우리는 똑같이 아름답고픈 현화식물   

추운 모랄의 하늘밑에서는   

항상 눈물 글썽여 이주하며 살아야했지.   

양(*)의 밝히는 발자국의 길이를 더 좁혀   

물결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군중의 황폐한 눈구석,   

죽음의 골짜기를 간신히 건너 뛰면   

아아   

어느새 실종의 오후.   

밤새의 천리성이   

외로운 그림자에 축축히 젖어 허물리는 것을   

또, 알고 있지.   

움직일 수 없는 것 중의 화려한 것이   

마침내 쓰러진 귀가길에서   

자기안에 불 일궈 연소시켜도 소용없을 것을,   

그러나 나는 끝까지   

결빙의 내 밑바닥을 뚫어나간다.   

신선한 근목이 보이잖게 찰찰 녹아있을 수원지여,   

그 지하수에 이르는 난항의 뱃길은   

선조가 단 하나 던져준 은근한 끈기의   

반접시 썰렁한 시간   

잔뼈에 떠있는 공복의 빙산을 위험하게 비켜나갈까,   

나는 몇 억을 살아야 도달할 수 있을까.   

하루는, 늘   

흙속에서 흙속으로 훌렁이는 약한 가교.   

기둥밑은 피로한 이론의 흙탕물이 괴어 있어서   

머리칼에 센 힘을 추켜 세워   

잔뜩 부틍켜안은 당신과 나의 허리를 나란히, 부러뜨린다.   

내 중심을 떠받드는 신의 열 손가락을 한 마디씩 자른다. 잘려나간다.   

생명의 돛이 재가끔 꺼져가는 동안   

방종은 되살아   

유리창 찬 살에 부딪는 별빛 나의 늦은 보행을 적시고,   

비틀거리는 순간에 끼어드는 사상   

우리의 아까이 총량은 조금씩 낮아진다.   

주위는, 가까이로부터   

허리는 시간의 높이와 발자국   

지표위의 온갖 동작의 해체소리.   

우리들의 허전한 내부와 외부   

앙상한 오솔길을 물갈퀴로 내왕하던 것들은   

전부, 쌀겨처럼 흩날린다.   

흙속에서 씻겨나가 흩날릴 것이다.   

이, 숨이 찰듯한 나의 발언을 수송하라.   

수심 깊은속의 내력을 샅샅이 읽어왔을 바람이여,   

오늘의 벼랑끝에서 미아가 된 나는   

스물 세살의 오늘의 질문을   

네 힘태로 트척한다.

강설의 아침에서 해빙의 저녁까지   

귀먹어가고 있을   

세상의   

밖에 살아있는 슬픈 내 연인에게….   

 

 


 

 

신대철 시인 / 바이칼

 

 

1. 은빛 물빛

 

큰 소나무 위에서   

품속으로 돌아온 아이들   

산 능선 걸치고 잠들어가면   

할머니는 먼 곳을 향해 웃으셨습니다.   

잔잔한 할머니 눈가에 잡히던 은빛 물빛   

바람에 눈빛승마에 반짝이던 은빛 물빛   

할머니 돌아가신 뒤에는   

먼 곳으로 번져갔던 웃음이   

숨결을 타고 아내의 눈가로 돌아왔습니다.   

눈 날리고 해 저물고   

아이들이 전자(電子)사막에서 헤매다 돌아와도   

아내는 모래와 흙과 먼지에 뒤덮인 채   

먼 곳을 보고 조용히 웃었습니다.   

은빛 물빛 할머니의   

할머니의 머나먼 할머니를 향해   

 

2. 바이칼에선 누구나 한 영혼?

 

숨결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길   

광활한 평원을 가로질러   

숨 부드러워지는 곳에서   

우리는 잠시 길을 멈추었습니다.   

백두대간을 타고 가면 한자리에 잔상으로 스치던 솜다리와 엉겅퀴와 민들레가 길언덕에 한데 어울려 있었습니다. 혼자 있어도 묵묵히 자기 대역을 하며 살아온 노인이 엉겅퀴 옆으로 끼어 들어가 무심히 서 있었습니다. 메마른 땅엔 흰 구름, 흰 구름, 솜털 가시지 않은 처녀들이 바람 따라 들어오다 주춤했습니다.

작은 구릉 위에서 누군가 바이칼! 바이칼! 하고 소리쳤습니다. 출렁출렁 푸르게 넘쳐오는 소리를 향해 일행들이 고개를 쳐들고 돌아보았습니다. 바이칼이 바로 눈앞에 있었지만 울란우데에서 온 노점상 부리야트 가족도 그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 몸속 어딘가에 바이칼 숨결이 흐르고 있었던가요? 바이칼이 우리 영혼의 이름이었던가요? 물살이 스치기만 해도 가슴까지 수심이 차올랐습니다.

(바이칼,   

우리가 있기 전에 우리가 오고   

우리가 있기 전에 우리가 그리워한 곳   

오래오래 꿈꾸어도   

물결 소리 들리지 않으면   

영혼이 머물 수 없는 곳)   

우리는 허공으로 숨 몰아쉬고   

높은 데로 오르고 오르다가   

수심으로 푸르게 숨쉬면서   

그대 눈으로 알혼 섬*을 보고   

내 눈으로 후지르를 생각하고   

한 영혼이 되어 호수를 건넜습니다.   

 

3. 후지르 마을

 

부르한 바위 앞에서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모두들 알몸으로 물속에 잠겼습니다.   

오색 물무늬들 어지럽게   

수면을 스치는 순간   

몸속에 들어와 있던 수심이   

조금씩 물살로 풀어졌습니다.   

가슴엔 일렁이는 푸른빛만 남았습니다.   

어린 시절 굴뚝 밑에서   

처음으로 죽음을 느끼고 울고 있을 때   

사람은 누구나 먼 곳에서 왔다가   

다시 먼 곳으로 돌아간다고 하시던 할머니,   

그 먼 곳을 무서워하며 그리워하던 시절부터   

머리 위에 붙어오던 까마귀떼들이   

벼랑 위 자작나무**로 옮겨 앉았습니다.   

흰 자작나무도 우리의 은빛 푸른 영혼?   

바이칼 바람 소리   

높고 은은해지고   

솔숲 우거진 산자락 아래 안 보이던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탯줄 같은 구릉길, 나지막한 분지에 포근히 들어앉은 후지르 마을, 행인 하나 없어도 빨랫줄에 옷가지 흔들리고 판자 울타리 휘어지게 넘어오는 흰 감자꽃들, 언젠가 들은 듯한 자장가 소리에 보얗게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바이칼 호에 있는 섬 중 가장 큰 섬. 섬 주민은 주로 후지르 마을에 모여 사는데, 대부분 부리야트인들이다. 이 섬에는 샤머니즘 성소인 부르한 바위가 있고 우리의 인당수를 상기시키는 설화도 남아 있다.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자작나무는 하늘과 인간을 중재하는 우주목이다. 샤먼이 되려면 하나의 통과의례로 자작나무를 올라야 한다.

 

 


 

 

신대철 시인 / 눈부신 소리

 

 

바이칼, 후지르 마을, 에스키모 수예품 같은 그림이 벽마다 붙어 있는 방, 문풍지 울리듯 거칠게 생나무 연기 뒤흔드는 살바람, 춤추는 불 그림자 한 가운데 꽃판을 이루는 고향의 어린 동무들

구릉으로 야생화로   

바이칼 소년으로   

꽃판 자주 바꾸어도   

잠 오지 않는 여름밤   

호숫가 벼랑 위에 앉았다. 별빛 흐려지는 은하수 근처에서 별똥별이 쏟아진다. 소원을 말해봐, 누가 속삭인다, 비밀이야, 누가 속삭인다, 누구더라, 누구더라, 아린 목소리만 남은 고향의 어린 동무들   

너는 소원도 비밀도 없니?   

누가 속삭인다.   

 

 


 

 

신대철 시인 / 군락(群落)

 

 

북암령   

눈 녹이는 한계령풀   

4월에 꽃 활짝 피우고   

6월에 씨 익히고   

지상에서 스러지는   

한계령풀 덩이뿌리 같은   

중환자실 노란 빛 속에서   

북암령 쪽으로   

나도 군락을 이룬다   

나와 나 사이   

아직 바람이 불고 있다

 

 


 

 

신대철 시인 / 물동이동

 

 

개 짓는 소리   

사람 부르는 소리   

호박꽃 속에서 잉잉거리고   

호박꽃술 묻히고 들어서면   

저절로 문 열리는 마을.   

강남에서 온 제비는 문패 위에 벌써 둥지를 틀었군요. 한 배 불려 그 옆에 새 둥지를 트는군요. 개흙 바르고 지푸라기 물어오고 흐르는 마음도 물어가는군요.

우리는 무심히 강남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물길 따라 소나기 몰려가다 갑자기 사라지던 곳, 제비 날갯짓에 무지개 걸리고 따발총 소리 울려오고 숨 막혀오던 곳, 그 아득해진 곳에서 제비만 돌아와 있군요.

흰 구름 밑으로   

우리도 돌아오는 중일까요   

물소리 내며 흘러온 물소리들   

아르방 다리 부근에서 잔잔해지고 있습니다.   

(떠날 때 물 위에 표시해 둔   

정처 없는 얼굴   

아른아른 물살에 되살아나는군요   

물이 시간을 돌고 있었군요)

 

―{서정시학} 2002년 겨울호

 

 


 

 

신대철 시인 / 고리섬

 

 

방앗간 탱자나무 울타리 밑으로 불어오던 들바람 소리, 방죽에서 흘러들던 비릿하고 후끈한 물냄새, 개구멍만 남은 동네 뒷문이 열리면서 황황히 들길로 사라지던 쫓기는 발자국 소리, 멀리 따가운 햇볕과 거칠게 흔들리는 보리밭 물결 위로 언뜻 떠오르다 가라앉던 검은 뒷모습, 그날 우리는 탱자를 따다 영문도 모르고 쫓겨갔던가, 비행기 소리 들리고 쫓길수록 달아날수록 앞지르던 공포, 공포, 숨도 고르지 않고 우리는 들 한가운데에 그냥 서 버렸고 느티나무에 올라앉아 사방을 둘러보았던가, 뜸, 뜸, 뜸부기 소리 희미하게 들리면서 봉긋하게 무덤 하나 부풀어 있었고 거기 웬 아저씨가 봉분 아래 깜부기 같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보리 물결이 눈 주름에 깊게 일렁이고 있었다,

지리산으로 들어간다는 아저씨는 우릴 하나씩 높이 들어올려 너희 세상은 이만큼 높은 세상이라고 말했다, 높은 세상? 아저씨는 우릴 봉분 위에 올려놓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오랑캐꽃과 까치밥풀이 무성한 그 자리에 우리도 앉아 보았다, 그늘 한 자락 없었지만 나무 아래보다 더 깊고 아늑해졌다, 몸에선지 어디선지 멀어질 듯 다가올 듯 스며들던 눈빛, 몸 속에 아른아른 아리게 자리잡던 긴 그림자, 어느새 흔들리는 보릿대 사이로 붉은 해 기울고 사라진 길과 동네 지붕이 슬며시 떠올라 있었다, 보리밭 물결 위에 높은 세상이?

보리 물결 타고 모두들   

가물가물 흘러가버린 곳에   

들도 없이 번지는   

탱자 향기 노랗게 익어가는 음성,   

영혼이 스쳐갔던 것일까,   

그때 처음으로   

우리와 아저씨를 한 몸으로 세운 영혼이?   

마른 흙바람 속에서   

우리는 듣는다, 한 점 고리섬을 넘어   

백두대간 굽이쳐 올라갈 큰 영혼을

 

―{시와사람} 2001년 가을호.

 

 


 

 

신대철 시인 / 들도 넘어가네요

 

 

까마귀 날개 밑에  

할머니의 지평선 마을이 깃들어 있었네요  

들로 오시지요, 할머니.  

다시 날아오는 까마귀떼 속으로요  

 

 


 

 

신대철 시인 / 백두대간을 타고 2

- 구륭산 능선 길

 

 

층층이 삭정이 가지로 뒤엉킨 낙엽송 사이를 뒤엉켜   

지나 도래기재에서 조그마한 산등을 타고 올라오는 능   

선 길에 이르자 눈만 적셔주던 길은 푸른 빛에

흘린 푸른 그림자에 배어들어 야생화를 더 강렬하게 피운다.   

혼자 걸어도   

홀로 갈 수 없는 능선 길.   

훤한 참나무숲을 가르는   

금강 소나무 가지에 길을 걸어두고   

회오리봉에 잠시 누워   

상봉에, 햇살 퍼지는 구름 저편에   

상처 난 다리를 얹고 있으면   

갈 데 없이 부는 바람에 실려   

둥둥 떠오르다 한없이 무겁게 흔들리는 몸, 속으로   

피아골에서 도장골에서 몸부림치며 스며들어와   

내 피 네 피를 달구며 섞는 뜨거운 대간의 숨, 숨결을 타고   

홀로 걸어도   

무리지어 가는 구륭산 능선 길.   

 

지평선 마을

산을 넘었습니다  

들로 오시지요, 할머니  

까마기떼 속으로요  

할머니께서 처녀적 꿈 예기를 하신 그 가을날 한 마리씩 산 넘어간 까마귀들 여기 다 모여 있네요. 발갛게 달아오른 지평선, 실개울 타다 남은 하얀 실연기 자국. 그 아래 잠겨가는 마을에서 해를 품고 살고 싶다 하셨지요? 들 가운데 까마귀떼 내리는 곳이 그 마을 아니겠냐 하셨지요?  

까마귀떼는 마을과 거리를 두고

 

 


 

신대철 시인

1945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 연세대 국문과와 同 대학원 졸업. 196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降雪의 아침에서 解氷의 저녁까지〉가 당선되어 시단에 데뷔. 시집으로 『무인도를 위하여』『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 』『자이칼 키스』가 있다. 제1회 박두진문학상 수상. 제4회 백석문학상 수상. 현재 국민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