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희 시인 /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Ⅱ
아침에 눈뜨면 세계가 있다. 아침에 눈뜨면 당연의 세계가 있다.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있다.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거기에 있다.
당연의 세계는 왜, 거기에,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처럼, 왜, 맨날, 당연히, 거기에 있는 것일까. 당연의 세계는 거기에 너무도 당연히 있어서 그 두꺼운 껍질을 벗겨보지도 못하고 당연히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
당연의 세계는 누가 만들었을까,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당연한 사람이 만들었겠지, 당연히 그것을 만들 만한 사람, 그것을 만들어도 당연한 사람,
그러므로, 당연의 세계는 물론 옳다, 당연은 언제나 물론 옳기 때문에 당연의 세계의 껍질을 벗기려다가는 물론의 손에 맞고 쫓겨난다. 당연한 손은 보이지 않는 손이면서 왜 그렇게 당연한 물론의 손일까,
당연한 세계에서 나만 당연하지 못하여 당연의 세계가 항상 낯선 나는 물론의 세계의 말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 물론의 세계 또한 정녕 나를 좋아하진 않겠지
당연의 세계는 물론의 세계를 길들이고 물론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를 길들이고 있다. 당연의 세계에 소송을 걸어라 물론의 세계에 소송을 걸어라 나날이 다가오는 모래의 점령군, 하루 종일 발이 푹푹, 빠지는 당연의 세계를 생사불명, 힘들여 걸어오면서,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은
그와의 싸움임을 알았다. 물론의 모래가 콘크리트로 굳기 전에 당연의 감옥이 온 세상 끝까지 먹어치우기 전에 당연과 물론을 양손에 들고 아삭아삭 내가 먼저 뜯어먹었으면.
- 시집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1995)에서
김승희 시인 / 제도
아이는 하루종일 색칠공부 책을 칠한다. 나비도 있고 꽃도 있고 구름도 있고 강물도 있다. 아이는 금 밖으로 자신의 색칠이 나갈까 봐 두려워 한다.
누가 그 두려움을 가르쳤을까? 금 밖으로 나가선 안된다는 것을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나비도 꽃도 구름도 강물도 모두 색칠하는 선에 갇혀 있다.
엄마, 엄마. 크레파스가 금 밖으로 나가면 안되지? 그렇지? 아이의 상냥한 눈동자엔 겁이 흐른다. 온순하고 우아한 나의 아이는 책머리의 지시대로 종일 금 안에서만 칠한다.
내가 엄마만 아니라면 나, 이렇게 말해 버리겠어. 금을 뭉개버려라. 랄라. 선 밖으로 북북 칠해라. 나비도 강물도 구름도 꽃도 모두 폭발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이다. 랄라. 선 밖으로 꿈틀꿈틀 뭉게뭉게 꽃피어나는 것이다 위반하는 것이다. 범하는 것이다. 랄라 나 그토록 제도를 증오했건만 엄마는 제도다. 나를 묶었던 그것으로 너를 묶다니! 내가 그 여자이고 총독부다. 엄마를 죽여라! 랄라.
- 시집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1995)에서
김승희 시인 / 별
별 에서 ㄹ이 떨어져서 무릎 같은 ㄹ이 떨어져서 땅에 내려와서 논에 들어가 벼가 되어서 벼로 패어서
일하는 농부의 다리 힘들어서 꺾어져서 주저앉아서 겹친 다리 꺾인 무릎 ㄹ이 되어서 벼를 모시고 쉬는데 때 그런 때 벼가 별이 되어서
- 시집 <냄비는 둥둥>(2006)에서
김승희 시인 / 희망의 연옥
“이 세상은 항상 폐허야. 하지만 우리에겐 작은 기회가 있어. 만약 우리가 아주, 아주 열심히 노력한다면, 우리는 선을 상상할 수 있을 거야. 우리는 파손된 것을 복구할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해낼 수 있어. 조금씩, 조금씩” (<벤야민의 마지막 횡단>에서)
그리고 그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작은 마을 안전지대에 도착한 뒤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 세상은 항상 그런 최후들로 가득 차 있다 파손된 것들을 복구하는 방법 너머로 가을이 온다 어딘지 그런 절벽들이 푸른 포도밭 과수원 뒤에 아득하다
포도밭 주인은 어디로 갔을까 피레네 산맥을 백번을 넘어도 그 너머 그 너머에도 페허와 절벽이 가득 차있는 가을 풍경 팔 하나 주면 안잡아 먹지, 눈 하나 주면 안잡아 먹지..... 감옥 그너머의 감옥, 절벽 그너머의 절벽, 최후 그너머의 최후 산맥을 넘고 넘어도 산맥 산맥 그너머의 산맥, 절벽 그너머의 절벽, 최후 그너머의 최후 우리는 그런 것을 감옥이라고 부른다 희망의 연옥이라고
- 시집 <희망이 외롭다>(2013)에서
김승희 시인 / 희망이 외롭다 1
남들은 절망이 외롭다고 말하지만 나는 희망이 더 외로운 것 같아, 절망은 중력의 평안이라고 할까, 돼지가 삼겹살이 될 때까지 힘을 다 빼고, 그냥 피 웅덩이 속으로 가라앉으면 되는걸 뭐....... 그래도 머리는 연분홍으로 웃고 있잖아, 절망엔 그런 비애의 따스함이 있네
희망은 때로 응급처치를 해주기도 하지만 희망의 응급처치를 싫어하는 인간도 때로 있을 수 있네, 아마 그럴 수 있네, 절망이 더 위안이 된다고 하면서, 바람에 흔들리는 찬란한 햇빛 한 줄기를 따라 약을 구하러 멀리서 왔는데 약이 잘 듣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믿을 정도로 당신은 이제 병이 깊었나,
희망의 토템 폴인 선인장......
사전에서 모든 단어가 다 날아가 버린 그 밤에도 나란히 신발을 벗어놓고 의자 앞에 조용히 서있는 파란 번개 같은 그 순간에도 또 희망이란 말은 간신히 남아 그 희망이란 말 때문에 다 놓아버리지도 못한다, 희망이란 말이 세계의 폐허가 완성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왜 폐허가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느냐고 가슴을 두드리기도 하면서 오히려 그 희망 때문에 무섭도록 더 외로운 순간들이 있다
희망의 토템 폴인 선인장........ 피가 철철 흐르도록 아직, 더, 벅차게 사랑하라는 명령인데
도망치고 싶고 그만 두고 싶어도 이유 없이 나누어주는 저 찬란한 햇빛, 아까워 물에 피가 번지듯....... 희망과 나, 희망은 종신형이다 희망이 외롭다
- 시집 <희망이 외롭다>(2013)에서
김승희 시인 / 맨드라미의 시간에
꽃이 도마에 오른다 말도 안되는 희망이라니 그런 말도 안되는 꽃이 도마 위에 놓였다, 계절 따라 피는 꽃들도 도마 위에 오르면 오소소 소름이 오른다, 소름이 돋아 피가 뭉쳐 도마 위에서 꽃은 붉은 볏으로 솟아난다, 얼굴이 빡빡 얽은 붉은 얼금뱅이가 고장 난 시계를 안고 도마 위 꽃밭에 만발한다, 도마 위에선 내일이 없기 때문에 두 눈 뜨고도 앞을 못 보기 때문에 내일이란 말을 모르는 맨드라미 얼굴에 붉고 서러운 이빨이 돋아난다 터널 끝에도 빛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맨드라미의 시간이라 부른다
피안을 거슬러 화단의 모든 꽃들과 돌들이 혹서를 치르고 있는 어느 여름날 바위마저도 스스로 다비하는 듯 우리는 그런 시간을 뜨겁고 붉은 맨드라미의 마그나 카르타라고 불러야 한다 해를 바라보며 목마름으로 더 타오르다 서서 죽는다
- 시집 <도미는 도마 위에서>(2013)에서
김승희 시인 / 바람을 옷에 싼 여자
여자, 바람을 옷으로 싸고 물을 보자기로 모으는 여자, 해와 별을 가슴에 기르고 정액과 피를 모아 (아, 너로구나, 너였구나....) 그것은 바람의 연애, 사람을 태어나게 한 여자
두 손으로 바람을 모아 뼈와 근육과 신경과 골수를 짜넣은 여자 영혼을 살로 싼 여자 심장 속에 절대로 꺼지지 않는 불을 넣은 여자 언제나 위험 보다 더 위험하고 허무 보다 더 허무하고 시간 보다 더 덧없는 여자
두 손에 모은 바람은 흐터지고 보자기로 싼 물은 흘러 떨어지고 살에 새겨 넣은 혼은 날아가고 숨결로 구름을 만들어도 절대로 꺼지지 않는 불을 심장 속에 간직한 이 여자, 인류 대대로 바람을 옷으로 싼 여자
김승희 시인 / 솟구쳐 오르기 2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날게 하지 않으면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솟구쳐 오르게 하지 않으면
파란 싹이 검은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나 무섭도록 붉은 황토밭 속에서 파아란 보리가 씩씩하게 솟아올라 봄바람에 출렁출렁 흔들리는 것이나 힘없는 개구리가 바위 밑에서 자그만 폭약처럼 튀어나가는 것이나 빨간 넝쿨장미가 아파아파 가시를 딛고 불타는 듯이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나
민들레가 엉엉 울며 시멘트 조각을 밀어내는 것이나 검은 나뭇가지 어느새 봄이 와 그렁그렁 눈물 같은 녹색의 바다를 일으키는 것이나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삶은 무게에 짓뭉그러진 나비알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존재는 무서운 사과 한 알의 원죄의 감금일 뿐 죄와 벌의 화농일 뿐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83』(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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