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하림 시인 / 어디로?
황혼이다 어두운 황혼이 내린다 서 있기를 좋아하는 나무들은 그에게로 불어오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있고 언덕 아래 오두막에서는 작은 사나이가 서랍을 밀고 나와 징검다리를 건너다 말고 멈추어 선다 사나이는 한동안 물을 본다 사나이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어디로?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중 46』(조선일보 연재, 2008)
최하림 시인 / 방울꽃
여러 기슭을 흐르고 들판을 돌아 마침내 영산강으로 태어난 사람아 무얼 그리 깊은 눈으로 보고 있느냐
불어오는 바람에 붉은 몸 비비며 울었다가 웃었다가 하던 수분령의 무진 장관 잡초들이냐 잡초의 빛이냐 슬픔이냐
황혼 속으로 빠르게 침몰해가던 너의 존재가 버린 시간들 더러는 슬픔이고 기쁨이 되어 거울 속으로 떠오르던 시간들 찬비 같은 시간들
그런 시간 속에 모래 쌓이고 바람 일어 누군가 금방 울고 간 것 같은
오늘은 방울꽃이 피었다
최하림 시인 / 달이 빈방으로
달이 빈방으로 넘어와 누추한 생애를 속속들이 비춥니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속옷처럼 개켜서 횃대에 겁니다 가는 실밥도역력히 보입니다 대쪽 같은 임강빈 선생님이 죄 많다고 말씀하시고, 누가 엿들었을라, 막 뒤로 숨는 모습도 보입니다 '죄 많다고고백하는 이들의 부끄러운 얼굴이 겨울 바람처럼 우우우우 대숲으로 빠져나가는 정경이 보입니다 모든 진상이 너무도 명백합니다 나는 눈을 감을 수도 없습니다
최하림 시인 / 집으로 가는 길
나 물 속처럼 깊이 흘러 어두운 산 밑에 이르면 마을의 밤들 어느새 다가와 등불을 켠다 그러면 나 옛날의 집으로 가 잡초를 뽑고 마당을 손질하고 어지러이 널린 농구들을 정리한 다음 등피를 닦아 마루에 건다 날파리들이 날아들고 먼 나무들이 서성거리고 기억의 풍경이 딱따구리처럼 소리를 내며 달려든다 나는 공포에 떨면서 밤을 맞는다 과거와 현재 사이로 철철철 밤이 흘러간다 뒤꼍 우물에서도 물 차오르는 소리 밤내 들린다 나는 눈 꼭 감고 다음날 걸어갈 길들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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