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환 시인 / 좋은 꽃
이렇게 생생할 수야 전생의 그대, 욕망의 흔적이 이길 수 없는 싸움에 지쳐 흐려진 내 이생의 눈망울을 때리는 그대 잎사귀의 원색, 그 순결한 운명에 짐 지워진 피할 수 없는 충동을 피 흘려 지금은 다만 그대를 건드려보기 위한 손가락의 마구 떨림과 그대의 그 아직도 의연한 자태 사이 내 비인 주먹과 그대의 그 복수심 같은 아름다움 사이 숨이 막히는 공간 속에 갇혀서 나는 와들들 떨려 그대의 그 진한 향기도 참지 못하고 그대도 아아 조금씩 눈물 반짝이며 흔들리며 섰나니, 그대의 꽃잎 자꾸자꾸 벗어버리는 고운 살결 같은 그대의 경련 벌써 끝없이 들키고 있음!
설운 몸, 수습하기도 전에 경미한 흔들림으로 그대가 내 발에 흘린 그대의 향기 그 피비린 맛에 나도 막강한 설레임만으로 그대를 사랑하기 훨씬 이전에 앙칼진 복수심으로 내 눈을 때리는 아름다운 꽃, 좋은 꽃,
김정환 시인 / 철길
철길이 철길인 것은 만날 수 없음이 당장은, 이리도 끈질기다는 뜻이다 단단한 무쇳덩어리가 이만큼 견뎌오도록 비는 항상 촉촉히 내려 철길의 들끓어오름을 적셔주었다. 무너져내리지 못하고 철길이 철길로 버텨온 것은 그 위를 밟고 지나간 사람들의 희망이, 그만큼 어깨를 짓누르는 답답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철길이 나서, 사람들이 어디론가 찾아나서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내리깔려진 버팀목으로, 양편으로 갈라져 남해안까지, 휴전선까지 달려가는 철길은 다시 끼리끼리 갈라져 한강교를 건너면서 인천 방면으로, 그리고 수원 방면으로 떠난다. 아직 플랫포옴에 머문 내 발길 앞에서 철길은 희망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끈질기고, 길고 거무튀튀하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 길고 긴 먼 날 후 어드메쯤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우리가 아직 내팽개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길이 이토록 머나먼 것은 그 이전의, 떠남이 그토록 절실했다는 뜻이다. 만남은 길보다 먼저 준비되고 있었다. 아직 떠나지 못한 내 발목에까지 다가와 어느새 철길은 가슴에 여러 갈래의 채찍 자욱이 된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89』(조선일보 연재, 2008)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영승 시인 / 이방인(異邦人) 외 8편 (0) | 2021.09.30 |
---|---|
안현미 시인 / 거짓말을 타전하다 외 4편 (0) | 2021.09.30 |
구상 시인 / 그리스도 폴의 강(江) 1 외 1편 (0) | 2021.09.30 |
최하림 시인 / 어디로? 외 3편 (0) | 2021.09.30 |
김승희 시인 /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Ⅱ 외 7편 (0) | 2021.09.30 |